이응준 교무

[원불교신문=이응준 교무] 위령가는 열반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천도를 빌어주는 노래이다. 위령가나 천도 재식에 사용되는 노래를 음악에서는 진혼곡, 또는 레퀴엠으로 장르를 구분할 만큼 종교음악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종교에서 천도, 장례에 대한 부분이 큰 위로와 정성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큰 슬픔 앞에서 슬픔과 아픔을 통한 위로는 떠나는 영혼을 위해서나 남은 이들을 위해서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더 정성스러움이 필요하다. 성가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슬픈 감정으로의 이입이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아픔을 통한 치유가 되기도 한다. 

앞에서 지나온 성가를 보면 태어나고 자라고 성인이 되어 생의 가운데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마침표를 찍는 순이다. 가례에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장례에 대한 성가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부분이다. 치유의 다양한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가를 통해서 원불교가 이야기하는 천도의 의미도 새겨볼 만다. 44장 위령가를 부르고 있으면, 슈베르트의 ‘연도문’의 멜로디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주제가 같아서인지 두 곡은 다른 듯 상당히 닮아있다. 종교는 달라도 열반인에 대한 천도의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의 표현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지만, 각기 다른 모습 속에서 찾고자 하는 삶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음악적으로도 멜로디의 진행이 슈베르트의 연도문을 떠올릴 만큼의 아름다운 슬픔을 노래하는 성가가 있다는 것도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없 다. 

날마다 즐겁고 희망찬 날이 될 수 있도록 기도와 자신을 향한 위로의 마음으로 위령가를 불러봐도 좋다. 남은 이들이 위로하는 방법이 꼭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법문에 의지하고, 깨달음을 통해서도 위로와 치유는 일어날 수 있다. 슬픈 감정을 통한 슬픔의 치유가 음악적인 부분이라면, 해오를 통한 위로는 수행일 것이다. 치유와 깨달음의 시너지를 성가를 통해 경험하면 좋겠다.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3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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