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하라는 것”(『대종경』교의품 5장)이라 명시한다.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의 진리에 근거하여 이를 본받아 일원상과 같은 인격을 양성하는 것이다. 

즉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의 진리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요 양성하자는 것이요 사용하자는 것으로, 이를 다시 말하면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견성이요, 일원상의 본형을 지키는 것은 양성이요, 일원과 같이 원만한 행실을 가지는 것은 솔성이라 한다.(회보 46호) 

지금 길거리에서 차(車) 소리가 들리는, 차 소리를 듣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손댈 데가 없는 가감할 것이 없는, 부족할 것도 더 바랄 것도 없는 원만구족한 자리이다. 또한 차 소리가 들리는, 차 소리를 듣고 있는 이 자리가 지공무사한 자리로, 이 소리도 그대로 드러나고 저 소리도 오롯하게 드러나는 사사로움이 없는 지극히 공변된 자리이다.

소리도 경계이다. 소리를 인연해 화나거나 짜증나거나 기쁘고 슬픈 생각 또는 감정이 일어난다. 이때 이러한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자리는 생각과 감정에 물들지 않는 텅 비어 고요한 깨어있는 자리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 마음이다. 짜증날 때 짜증난 줄 아는 이 자리는 짜증에 물들고 동일시되는 자리가 아니며, 기뻐하되 기뻐하는 줄 알아차리는 자리는 기쁨에 파묻히는 자리가 아니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되 생각과 감정이 드러나는 본래 자리는 경계에 끌리어 종속되고 경계에 빠져 매몰되는 자리가 아니다. 마음에 상처로 파고드는 소리일지라도 명백하게 드러내면서 그 소리에 물들지 않는 깨어있는 자리다. 

이처럼 일원상의 수행은 온갖 경계가 환히 드러나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 자리를 알자는 것이며 또는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사용하자는 것이다. 

정산종사는 회보 38호 ‘일원상에 대하여’에서 일원상을 체받는 실경을 제시한다. “혹 어느 기회에 탐심이 동하거든 즉시 발견하여 ‘아~ 내가 일원상(망상 없는 곳)을 망각 하였구나’ 하고 급히 그 마음 돌리기에 힘쓰며 또 어느 기회에 진심이 동하거나 치심이 동하거나 기타 무슨 망상이 동할 때에도 또한 그와 같이 힘써서 동정 간에 오직 자주 생각하고 자주 대조하여 낮과 밤에 그 마음대중(일원상에 반조하는 대중)을 놓지 아니하면 이것이 이른바 일원상 체받는 법이니라”라고 실례를 들어 밝혔다. 일원상의 수행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체받는 것이 핵심이다. 일원상을 표본하지 않는 수행은 소태산의 수행법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원상이 드러나지 않는 수행은 표본 없는 자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태산 마음공부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체받는 수행이다.

/나주교당

[2020년 3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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