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필자는 학창시절 ‘원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따라서 원불교인은 불교적 깨달음을 추구하고, 부처를 지향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원불교는 불교가 아니라는 재가출가 교도가 늘면서, 필자는 불교와 다른 원불교적인 깨달음의 세계가 있는지 의문이 걸렸다.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불교적인 신앙과 수행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원불교가 불교가 아니라면 불교적 깨달음과는 다른 원불교적 깨달음, 또는 깨달음으로 완성된 인격도 부처나 여래가 아닌 원불교만의 독창적인 무언가를 제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되자고 하면서도 원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원불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깨닫고 깨달은 뒤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종종 ‘일원상’이 원불교의 독창적인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곧 원불교만의 깨달음의 세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종사는 불교정전에서 일원상이 자각선사의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과 남양 혜충국사가 최초로 그린 일원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선(禪)불교의 깨달음과 진리관을 바탕으로 원불교의 깨달음과 진리관은 형성된 것으로, 일원상 진리를 내세워 불교와 다른 원불교의 독창성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근 교단에서는 법위사정을 6년마다 실시하는 방향을 정했다. ‘법위인플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법강항마위 승급자가 급증해 왔다는 점에서 법위사정 제도를 정비하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정기일기나 상시일기를 제출하는 정도의 방법이 법위사정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원상 진리를 각득하지 못한 채 닦음만 반복하는 것은 자칫 오렴수(汚染修)에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전 법위등급에서는 법이 백전백승하고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으며,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은 사람이라야 법강항마위에 승급할 수 있다고 했다. 일원의 위력을 얻고 체성에 합한 사람을 말하며, 이런 사람이 중생제도의 만능을 얻었을 때 출가위와 여래위가 된다. 

대종사의 깨달음을 이어가는 우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공부해야할지 잘 살펴야 할 때다. 만일 원불교만의 독창적인 깨달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항마위가 아닐 것이다. 정산종사법어 근실편 14장에서는 ‘그 뿌리를 잘 가꾸어야 지엽도 무성하고 결실도 충실하다’라고 했다. 뿌리 잃은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법위사정 제도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나, 세상을 둘로 나눠 보는 이원론적 시각에서 점점 망각되고 있는 원불교 깨달음의 연원을 되돌아보고 다시 회복해 가는 것도 중요하다. 견실한 뿌리를 회복해 보살과 부처의 결실이 넘치는 교단의 내일을 꿈꾼다.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4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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