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정전 게송은 ‘일원상 게송’이다. 왜냐면 일원상의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게송을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전했다. 공전(公傳·共傳)은 법의 민주화로, 일원상은 모두의 것이므로 깨치면 누구나 다 법의 주인공이라는 선언이다.

소태산은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라 부연하며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眞體)이니 사량(思量)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 말고 관조(觀照)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대종경 성리품 31장) 당부한다. 

사량은 일어나는 생각에 붙잡히어 본래 깨어있는 텅 빈 생각의 바탕자리를 망각하고 다만 이러한 생각에 빠져 생각을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라면, 관조는 생각이 일어날 때 경계에 끌려가는 생각을 내려놓고 생각을 드러내는 바탕자리인 텅 빈 각성을 돌이켜 비춰보는 것이다.

관조는 지금 들려오는 차 소리를 듣는 자리를 돌이켜 직시하는 것이다. 차 소리도 생겨났다 사라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한다. 이때 차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펼쳐지는 당처를 돌이켜 비춰보면 텅 비어 고요하면서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자리이다. 이 자리는 생멸이 없는 자리로 이 자리에서 소리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는 것이다. 차 소리를 듣고 있는 텅 빈 무(無) 자리에서 차 소리가 생했다가 멸해가는 유(有) 자리가 꿰뚫어 있는 것이다. 불변하는 무(無) 자리와 변하는 유(有) 자리가 서로 바탕하여 한 자리로 녹아있는 것이다.

불변하는 무(無) 자리와 변하는 유(有) 자리가 돌고 돌아 지극하면 불변하는 무 자리가 곧 변하는 유 자리이며, 변하는 유 자리가 곧 불변하는 무 자리이다. 변하는 유는 불변하는 무에 바탕한 유이고, 불변하는 무는 변하는 유로 나타나는 무이다.

지금 들려오는 차 소리를 듣고 있는 자리를 직시하면 변하는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불변하는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유와 무로 규정할 수 없는 구공한 자리(俱空)이다. 그러면서 또한 변하는 유와 불변하는 무를 다 갖춘 유와 무가 구족(具足)한 자리로, 능히 불변하는 무(無) 자리이면서 능히 변하는 유(有) 자리이다. 능이성유상(能以成有常)으로 보면 불생불멸하고, 능이성무상(能以成無常)으로 보면 인과보응으로, 유와 무가 서로 바탕해 원융하게 녹아 있는 것이다.

하나로 두렷한 실상인 일원상은 변하는 유(有)로 확연이 유하고 불변하는 무(無)로 두렷이 무하나, 변하는 유라 하면 어느새 불변하는 무이고, 불변하는 무라 하면 어느새 변하는 유로써,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구공(俱空)이면서, 또한 능히 유(有)한 중에 무하고 능히 무(無)한 중에 유하여 유와 무가 구족(具足)한 자리이다. 

게송은 유와 무가 한 자리인 일원상 노래이다.

/나주교당

[2020년 4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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