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광동진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저 태양보다 다숩고 밝은 힘이 있나니, 그러므로 이 자비가 미치는 곳에는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녹아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하며, 잔인한 마음이 녹아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변하며 인색하고 탐내는 마음이 녹아서 혜시하는 마음으로 변하며, 四相의 차별심이 녹아서 원만한 마음으로 변하여 그 위력과 광명이 무엇으로 가히 비유할 수 없나니라」(대종경 불지품 제2장)
오늘과 같이 현대 인류 사회의 각분야가 걷잡을 수가 없이 위축 혼탁하여 가고 있는 원인은 어디 있는가 하면 그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각인 각자가 다 제가 옳다고들 주장하는 그 개개인의 아집에서 타인에게 미치는 어떠한 해로운 영향이나 대중사회의 공익을 조금도 돌보지 않는데 있다 할 것이다.
단지 자기 본위로 모든 일을 독단하려는 데서 반목이 생기고, 쟁투를 일 삼으며, 개인의 이익과 행복에 부심이 되어버리는 까닭에 필경 이 사회는 질서를 읽게 되고 마침내는 수라장화 되어가기 마련인 것이다. 古書에 이르기를 「분노와 진심을 버려라. 그리고 다른 사람의 그름을 보고 어느 사람에게나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으니 집착이 생긴다. 저 편이 옳다고 주장한즉 이편에 그름이 없을 수가 없고, 이 편에서 또한 옳다고 주장한즉 저 편에 그름이 없지 못하니, 내가 반드시 성인이 아닐진대 저 사람이 어리석다고 할 수 없으므로, 도시 둘이 다 범부임을 깨달아야 한다」(絶忿棄嗔, 不怒人違, 人皆有心, 心各有執, 彼是則我非, 我是則彼非, 我心非聖, 彼心非愚, 共是凡夫耳) 하셨다.
거개의 사람들이 다만 자기 본위로 시비곡직을 다투므로 인해서 사심을 이르키게 되며 마침내는 자기 중심의 <도그마>에 떨어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인간은 거개가 다 범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 각기 시비곡직을 따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러고 그런 것이라고 해서 물론 시비를 방임해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옛날의 小乘들이 인간 세상 밖으로 자기들의 존재가 초월하였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인생을 한낱 夢幻이라, 허구라 하여 白眼視하는것도 인생 그 자체를 올바로 이해하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인간으로 하여금 실사회 생활을 해 나간다는 아무런 목적도 방도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현대 사회가 극도로 부패 혼탁해 가고 있다고 해서, 한가지로 타락한다거나, 방관한다거나, 또는 이를 비관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등사는 참으로 우매하고 비겁하다 할 것이다. 아무튼 혼탁한 사회에 살면서도 그 탁류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어디까지나 이를 헤쳐나서 ?化하여 나가는 위대한 힘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이 위대한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신앙이라야 할 것이다.
이 신앙의 문제는 어느 계층의 사람을 막론하고 심중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문제라 할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개인이든 단체이든 자기의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자력과 타력이 아울러 나가는 이 신앙으로 자기를 창조하고 사회를 향상시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것은 자기와 타인과의 어떤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자기와 인간 이상의 힘, 개체와 전체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修養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수양의 근원적인 대상, 주체성 목적관은 어디에다 두고 나아가야 할 것이지, 결국 수양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와 구체적으로 직결되어야할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炭은 어디까지나 탄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신앙과 수행의 주체 없이 거저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거저 살아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갑과 을이 서로 싸우고 타협하고, 또는 서로가 조화되어 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결코 궁극적으로 올바른 입장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시비가 다 본래적으로 虛假不眞實의 것이라면 이러한 불실을 돌이켜 참되고 실다웁게 만드는 절대적인 진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탄에다 불을 피우듯, 일체 선악을 은혜와 자비의 聖火로써 和光同塵하여 가는 그 위대한 힘이 우리들 인간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시비 선악도 虛假不實의 인생으로도, 한번이 절대적인 위력을 체득하면 自度 他度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아만이 있고 집착이 있다. 이 아만과 집착을 모름지기 제도하는 은혜와 자비의 덩어리, 이가 곧 신앙의 위력이며, 實體인 것이다.
이 신앙에는 두 가지의 절대적인 행방이 있다. 그 하나는 어떠한 혼탁한 세간이라도, 어떠한 인간의 부패나 타락이라도, 인간 세상의 五逆十惡을 다 은혜와 자비로써 구제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죄악이 치성하는 유위적 존재가 모름지기 이 은혜와 자비가 아니면 구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앙 그 자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실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무를 떠나서 불이 있을 수 없듯이 신앙이 없는 것은 이 세계에 인간이 존재하는 주체와 가치를 상실하였다는 증거 일수밖엔 없다.
불이 용광로에 무쇠를 녹여버리는 것과 같이 은혜와 자비의 위력은 이 사회에서 자각적인 인간의 창조적 근원으로 진실한 인간적 세계적인 協同性으로 구현되어야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치도 실업도 예술도 문명도 다 이 신앙에 의하여 참 생명을 얻는바 되어야 하겠다.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신앙이 참 생명이다. 모든 인간에게 견인불발의 신앙이 있을진대 어떠한 혼탁한 세간에 처하든 또는 어떠한 부패 내지는 퇴폐의 공기 속에 저촉되든 초연히 그 탁류에 물들지 않고 당당히 자기의 신념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해결해 내는, 인생의 승리자로서 공고히 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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