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타원 김영신 대봉도
(融陀圓 金永信 1908~1984)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
원기38년 4월 26일 성업봉찬시 남녀 은족 일동 사진촬영(1열 좌로부터 3번째가 김영신 대봉도)
원기38년 4월 26일 성업봉찬시 남녀 은족 일동 사진촬영(1열 좌로부터 3번째가 김영신 대봉도)
원기38년 연화장을 받는 김영신, 조전권 선진
원기38년 연화장을 받는 김영신, 조전권 선진
원기47년 2월 23일 대산종법사 취임식 때 찍은 사진(좌로부터 첫번째가 김영신 대봉도) 
원기47년 2월 23일 대산종법사 취임식 때 찍은 사진(좌로부터 첫번째가 김영신 대봉도) 

 

풍경 하나
경성회원 지환선은 몸이 뚱뚱했다. 권동화와 이동진화는 대종사님이 더 뚱뚱한가, 지환선 씨가 더 뚱뚱한가 하고 내기를 걸었다. 김영신이 말했다.
“재 봐야 알죠?”
“그럼 영신이가 가서 재봐!”
영신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끄나풀을 가지고 조실로 갔다. 대종사님이 영신에게 물었다.
“뭐 하러 왔어?”
“대종사님, 배 재러 왔어요.”
“뭐?”
“대종사님 하고 지환선 씨 하고 누가 배가 더 큰가 재러 왔어요.”

풍경 둘
하루는 전음광 교무가 느닷없이 물었다.
“영신 씨, 영신 씨, 논 가운데 나무때기가 갓 쓴 게 뭔지 아시오?”
“모르겠는데요?”
“허수아비지요. 한번 글자를 써 보시오.”
시키는 대로 써 보았더니 송(宋)자다. 송도성 교무의 성씨인 송자다. 셋이 폭소를 했는데 김영신의 웃음소리가 본시 유별나 소리가 컸다. 이때는 아무 일이 없었는데 한참 뒤 송도성 교무가 머리를 긁으며, “저 사람이 나를 허수아비라 했는데 허수아비는 그래도 양반이제, 갓이라도 썼으니. 전(全)씨는 김(金)씨에게서 귀 두 쪽이 떨어져 나간 상놈이여” 한다. 셋은 또 폭소를 터뜨렸다. 그때 조실에서, “영신아!” 하고 불렀다. 남녀 웃음소리가 그침 없이 났으니 그냥 둘리가 없었다. 
“왜 웃었어. 남녀가 합해서 그렇게 큰소리로 웃으면 누가 뭐라 하겠느냐.” 
김영신이 “종사님, 죄송스럽지만 사실대로 직고할 테니 들어 보십시오” 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허허허, 웃게 생겼다. 그래 가 봐라.” 

융타원 일가의 출가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의 구도역정기에 실려 있는 일화다.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대종사님과 제자들, 그리고 총부 대중들의 격의 없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사실 우리가 상상하고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은 아닐까? 이달에는 이 두 이야기의 화자인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는 1908년 2월 6일 서울시 종로구 인의동에서 부친 김일환 선생과 모친 이성각 여사의 2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그러나 생후 5개월 만에 부친을 사별하고 외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한학을 익히다가, 아홉 살 되던 해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 열세 살 되던 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혔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했던 융타원 대봉도는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며 운동 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장래를 촉망받던 융타원 대봉도에게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찾아왔다. 경성여고보 재학시설 서울 8개 여학교 가을연합운동회에 학교 육상대표로 출전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에 큰 부상을 입고 생사를 넘나드는 위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민자연화와 어머니를 따라 백용성 스님이 창설한 대각교를 다녔던 융타원 대봉도는 관음주력신앙을 통해 기적적으로 그 위경을 넘길 수 있었다.

이 무렵 평소 외가 어르신들과 친분이 있었던 일타원 박사시화와 그의 쌍둥이 자매 박공명선 선진이 자주 찾아와 “전라도에서 생불님이 왔다”며 집안 어른들에게 만나볼 것을 권유해 왔다. 마침내 원기9년 늦가을 어느 날, 거듭된 집안의 우환으로 걱정을 하던 외할머니 민자연화가 생불님을 만날 수 있다는 호기심에 두 딸 이성각·이공주를 데리고 소태산 대종사가 머물고 있던 창신동을 찾았다. 이것이 바로 융타원 대봉도 일가의 원불교와 첫 인연이었다.
그 인연으로 경기여고를 졸업한 융타원 대봉도는 당시 초대 경성지부 교무였던 주산 송도성 종사의 지도로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대종사의 명에 따라 부기학원을 다니며 출가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원기13년 봄 마침내 “본관으로 내려와 결산 사무를 도우라”는 대종사의 명을 받들어 출가를 단행하고, 본관 서무부 서기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제1대 제1회 12년을 결산하는 결산 사무를 조력하며 전무출신으로서의 정신적 기초를 다졌다.

원불교 여성 교무 1호
제1대 제1회 결산 사무를 모두 마친 융타원 대봉도는 원기14년 경성지부로 돌아가 서기와 순교로 활동을 하다가, 원기18년 다시 본관으로 돌아와 상조부와 공익부의 문서장부 보조사무를 담당했다. 융타원 대봉도가 마침내 교화자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은 그 이듬해인 원기19년 6월, 그의 나이 스물 일곱되던 해였다. 그의 첫 부임지는 부산 남부민교당으로 그의 교화현장 진출은 여성으로서 정녀로서 최초의 원불교 교무가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발령에 당사자로서의 걱정은 태산이었다. 그것도 원불교 여성 교무 1호라니. 소태산 대종사는 그런 융타원 대봉도를 위해 공회당에 대중을 모아놓고 “영신이가 여성교무의 시발이니 우리 다함께 만세를 불러주자”하여 대중이 함께 만세를 합창하도록 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 홀로 길을 떠나는 그에게 “너는 앞으로 기관사가 되어라. 짐차 객차를 앞에서 끌고 가는 모범 기관사가 되어라” 하는 말씀으로 그 앞길을 격려했다.

첫 부임지인 남부민교당은 당시 하단교당 교무로 있던 삼산 김기천 교무가 부산 시내권 교화를 위해 남부민동 산비탈에 단칸 셋방을 얻어 기지를 마련한 곳이었다. 스물일곱 나이의 젊은 여성이 교화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삼산 김기천 종사가 곁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줬으므로 교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듬해 가을 삼산 종사가 장티푸스로 갑작스럽게 열반에 들자 부산 교화는 온통 그의 책임이 되고 말았다.
처음 단칸 셋방에서 여름 선을 났을 때 찾아든 선객이라고는 불과 다섯 명. 더구나 그들 대부분은 아직 한글도 해득하지 못한 까막눈이었다. 융타원 대봉도는 먼저 한글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야학을 열고 30계문을 야학 독본으로 삼아 한글 교육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교수법은 조금은 특별했는데 그만큼 효과도 커서 교도들이 점점 재미를 붙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교도들도 차차 늘어나 교화에 재미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가령 ‘살생을 하지 말며’를 가르칠 때 젓가락으로는 ‘살’자를 집고 왼손 손가락으로 하나를 곱으며 ‘살’하고 발음을 하도록 하여 양손과 입이 마주 떨어지도록 가르쳤다. 손가락으로 둘을 꼽으며 ‘생’을 발음하도록 하고 셋을 꼽으며 ‘을’을 발음하도록 해서 손과 입에 서로 동시에 맞아 떨어지도록 해서 몸과 입으로 함께 글을 익힐 수 있도록 교육을 했다. 그 결과 얼마 있지 않아 인근에 초량교당을 개척할 정도가 되자 초량교당 초대교무로 부임을 했다.
융타원 대봉도는 초량에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교당을 신축하고 부산 일대 교화의 기초를 다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오직 일원대도 정법을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보낸 세월이었다. 주위의 비방과 조소에도 “만약 포악한 사람들이 교화를 방해하고 너를 죽이면 어찌하겠느냐”는 세존의 물음에 “보기 흉한 몸뚱이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니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겠다는 부루나 존자의 이야기를 교훈삼아 용맹심으로 교화에 임했다.

개성 교화의 개척자
그러나 학창시절 크게 다쳤던 얼굴에 다시 단독이 오르면서 더 이상 교화현장에 머물 수가 없었다. 원기23년 융타원 대봉도는 신병 치료차 잠시 경성에 머물며 휴식의 시간을 가졌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개성교당 교도들의 요청에 따라 개성으로 부임했다. 그는 야학을 개설하고 한문, 주산, 작문 등 중등과정을 가르치며 교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평양 교화의 꿈까지 설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앞날을 내다본 소태산 대종사의 명으로 본관으로 돌아왔다.

원기26년 본관으로 다시 돌아온 융타원 대봉도는 공익부장·육영부장 등을 역임하며 주변의 청소년들을 모아 야학을 하고, 박창기 대봉도와 함께 유년회인 ‘자공회(子供會)’를 조직해 그 지도에 힘썼다. 이후 다시 교화 현장으로 나가 원평, 신태인, 전주, 동래교당 교무 등을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교화를 크게 일으켜 세웠다. 융타원 대봉도는 원기28년 수위단원에 피선됐으며 원기38년에는 조전권과 함께 교단 최초로 연화장을 수여했다.

융타원 대봉도는 일찍 아버지와 사별한 관계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가 전주교당 재임시절 전주양로원을 설립한 것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의 발로였다. 그는 원기56년 교화현장에서 벗어나 중앙수양원 교감으로 재직하며 원불교 복지사업의 기초를 다졌다. 원기68년 극진히 모시던 어머니가 98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자 익산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긴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는 이듬해인 원기69년 77세를 일기로 어머니를 쫓아 열반에 들었다.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 약력
원기10년 10월 14일 입교 
원기13년 4월 서무부 서기를 시작으로 
서울, 남부민, 초량, 개성교당 근무 
원기26년 공익부장, 육영부장 역임 
원기27년 원평, 신태인, 전주교당 근무 
원기38년 교무부장 역임 
원기40년 동래교당, 총부 순교감, 
원광사 사장, 의정부 근무 
원기56년 중앙수양원 교감
원기69년 12월 7일 열반

정리 오정행 교무ㆍ경장교당

 

[2021. 5. 28. 마음공부25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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