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천 교무
이현천 교무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원기28년(1943) 열반한 소태산 대종사의 장의행렬 거리는 현재 신용동 중앙총부부터 신흥동 장자산 공동묘지까지 약 7.5㎞다. 지금도 하루에 7㎞ 이상을 걷기 쉽지 않은데 영양섭취도, 신체조건도, 인프라도 부족했던 그 시절 우리 선진들은 소태산 대종사의 상여를 메고 그 길을 걸었다. 단 두 번 주어진 쉬는 시간, 상여는 땅에 내려와서는 안 됐기에 선진들은 상여를 멘  채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 노고를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소태산 대종사는 그 당시 사람들보다 체구가 컸고, 체중 역시 많이 나갔기에 자체 제작한 관에 모셔야 했다. 따라서 그때의 상여 무게는 일반적인 상여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다. 

또‘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속의 뿌리가 뽑혀버린 것 같은, 가슴이 찢어지고 내장이 끊기는 것 같았다던 그 슬픔의 무게는 어땠을까. 아픈 기억은 누구나 잊고 싶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후진들에게 전해준 원로교무의 신성은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장의행렬의 고생은 화장장에서도 계속됐다. 거구의 소태산 대종사를 위해 맞춤 관을 짜서 모신 탓에 그 관이 화장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다시 관을 해체해 성해를 화장장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분해된 관은 후에 소태산 대종사 진영을 모시는 함으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그렇게 화장을 마친 성해는 다시 총부로 모셔져 49재를 지내고, 장자산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당시 설립한 묘비와 묘역의 석물들은 현재 중앙총부 일대에 모셔져 있다.

지금은 길도 새로 나고 건물도 들어서서 그때의 그 경로를 온전히 걸을 수도 없고, 그 무거운 상여를 메볼 수도 없다. 그때의 슬픔을 온전히 체감하기도 사실 어렵다. 하지만 원로교무의 고증과 후진의 답사와 조사를 통해 우리는 그때 그 길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며 걸을 수 있게 됐다. 앞으로 더 많은 재가출가 교도들이 함께 이 길을 걸으며 그때의 신성과 교법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진들은 서슬 퍼런 일제의 탄압에도 신성과 교법정신으로 뭉쳐 소태산 대종사의 장례를 엄숙히 치르고, 그 역사를 기억하고 전해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전하려는가. 길은 많은 사람이 다닐수록 단단해지고 오래 간다. 선진의 신성과 정신이 배어있는 길을 우리가 걷지 않으면 미래의 후진들도 역시 그 길을 걷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혁신과 미래, 발전을 이야기하며 종교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잊은 채 앞만 보고 가고 있지 않은가. 역사와 정신을 케케묵은 것으로 치부하는 요즘 사람들처럼, 혹 우리 자신도 모르게 시대에 동화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2022년 1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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