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섭 교도
김준섭 교도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사진은 순간입니다. 0.01초 안에 기록되는 모든 것이 영원한 역사로 남죠. 그게 사진이고, 그 일을 하는 이가 사진작가예요.” 
짧은 한 마디에 이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프로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모두 표현된다.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 사람들의 희로애락 그리고 그 사연을 담는 일. 아마 세상의 모든 사진작가들은 이를 사명으로 알 것이다. 그런 사진작가로 평생을 살아온 김준섭 교도(금산교당). 그에게서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기운이 느껴진다. 
돌 된 아이부터 환갑의 어르신, 때론 아이들의 운동회를 찾아가거나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를 만나기도 하며, 어느 때는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나 모임까지. 그가 담은 사진에는 사연도 다양하고, 웃음도 눈물도 있었다. 

믿음 주는, 밝은 사진 만드는 사진관
기술을 배운다는 게 쉽지 않던 시절. 지금은 학원도 많고 교육시설에서 수강료를 내고 배워 자격증을 취득하면 되지만, 70년대는 지금과 참 달랐다. 지인의 권유로 사진관에 발을 디뎠다가 평생의 생업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김 교도. 10대 후반부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진관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유심히 지켜보기를 몇 해, 또 밤중에 사진 인화 연습도 많이 했다.

“예전에는 기술을 배우기가 힘들었어요. 가르쳐 놓으면 나가서 독립해 버리니까 이발사도 양복점도 구둣방도 그 누구도 자기 기술을 쉽게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죠.”

재능이 좋아서였는지 또는 성실함의 결과였을지, 김 교도는 먼저 온 선배보다도 앞서 기술을 익혔고 28살이 되던 해 창업을 했다. 
“믿을 신에 밝을 명, 신명사진관. 처음 개업할 때 지은 상호입니다. 믿음을 주는 사진관, 밝은 사진을 만들어 주는 사진관. 마음에 들었습니다. 뜻도 좋고 기억하기도 좋았죠.” 
아마도 신뢰 깊은 사진관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었던 의미였을지. 그렇게 개업한 신명사진관은 단 한 번도 그 터를 떠나지 않고 45여 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 인연이 된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아마도 오다가다 그의 카메라에 잡힌 인연만도 수만 명이 넘을 것이다. 

특히 마음이 쓰이는 손님들도 있었다. 돌아가신 남편의 생전 사진을 들고  가족사진을 찍으러 온 손님. ‘생전 가족사진 한번 찍자’고 말만 하고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미루던 일이 이제는 영영 어렵게 된 사연도 있었다. 

또 형편이 어려워 대금 지불을 하지 못해 졸업앨범을 찾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앨범을 선물로 주면서 소중한 추억을 선물하기도 했다. 
 

신뢰 깊은 사진관, 45여 년 세월 카메라로 맺어온 인연
교당과 함께 보낸 일상, 전국 원광어린이집 출장만도 10여 년

손님이 찾아온 촬영실에서.
손님이 찾아온 촬영실에서.

금산교당과 함께 보낸 세월
금산교당과 신명사진관의 거리는 반경 100m 정도. 그렇다 보니 교무님의 잦은 부탁이 많았다. 1980년대 연탄불을 피던 시절, 교무님으로부터 ‘먼 곳에 출장 중이니 방에 연탄불을 갈아달라’는 심부름부터, 교당에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찾아갔다.
교당에 원광유치원이 처음 개원할 때도 그랬다. 주임교무의 부탁으로 유치원 개원을 위한 일들을 도맡기도 했다.

“유치원 인가 서류를 내러 교육청에 갈 때 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그 눈 속을 걸어 서류 제출했던 날이 지금도 기억나네요.” 처음 금산원광유치원이 개원될 때 공간이 따로 없어서 법당을 유치원 교실로 활용해야만 했다. 6일을 유치원 교실로 활용하다가 일요일은 법회를 열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유치원 교재와 기구 등을 항상 치우고 들여놓기를 반복했고, 김 교도가 손을 보태는 일이 잦았다. 

사진관의 주인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에서 소풍이나 생일잔치, 운동회 등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교당 교도로서 조력했고, 사진작가로서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또 교당 행사 때는 어떤가. 청년 야외 활동이 있다거나, ‘어린이날 민속큰잔치’, 법호수여식, 교도 훈련 등 교당의 크고 작은 활동에서 김 교도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원기78년(1994)쯤 당시 교무님의 인연으로 전국의 원광어린이집에 사진 촬영을 다니기도 했다. 멀리 영양부터 안동, 영주, 영광까지, 가깝게는 강경과 계룡 등으로 다닌 출장 햇수만도 10여 년이다. 

“그때 학부모들로부터 많은 호응이 있었어요. 그리고 교무님 덕분에 전국 구경도 잘 다니고 인연도 많이 생겼죠. 자기 아이가 예쁘게 잘 나왔다고 추가로 더 해줄 수 없냐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아이들의 환한 미소,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부모에게 전해주는 일만큼 그에게는 값지고 보람된 일이 또 없을 것이다.

김 교도가 촬영해서 만들어 낸 앨범들.
김 교도가 촬영해서 만들어 낸 앨범들.

가장 아름다운 얼굴
김 교도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항상 가장 좋은 옷에, 가장 예쁜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화장도 하고 미용실도 다녀오고, 그러면서 예쁘게 찍어 달라고 말한다.

“가장 마음에 새겨진 법문이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입니다. 가장 예쁜 눈은 미운 사람 곱게 봐주는 눈, 가장 예쁜 입은 남을 살려주는 말을 하는 입이라 생각합니다.” 한평생 사람의 얼굴을 사진에 담아왔던 그가 강조해서 전하는 메시지다. 감사생활이야 말로 가장 예쁜 얼굴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전해주듯. 혹 45여 년 여러 인연을 만나면서 그가 바라본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또 한 번 그가 말한다.

“감사생활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죠.”

[2023년 1월 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