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균 교수
윤덕균 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대종경> 부촉품 12장에서 소태산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에 세 가지 어려운 일이 있으니, 하나는 일원의 절대 자리를 알기가 어렵고, 둘은 일원의 진리를 실행에 부합시켜서 동과 정이 한결같은 수행을 하기가 어렵고, 셋은 일원의 진리를 일반 대중에게 간명하게 깨우쳐 알려 주기가 어렵나니라. 그러나 수도인이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한 번 이루어 보기로 정성을 다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쉬운 일이 되어질 것이요,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안하려는 사람과 하다가 중단하는 사람에게는 다 어려운 일이 되나니라”고 했다. 이에 저자는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로서 용기백배하여 일원의 진리를 일반 대중에게 간명하게 깨우치기 위한 노력으로 일원상을 108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원 108상을 연재하려고 한다.

본 연재의 첫 제목을 ‘일원상 진리를 각하면 팔만대장경이 소용없다’고 붙인 이유는 법정 스님의 <선가귀감> 역주에서 연유한다. 법정은 태초부터 존재하던 일원상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마음.성품.진리.도라 하여 억지로 이름을 붙였으나 어떤 이름으로도 맞지 않고 무슨 방법으로도 그 참 모양을 바로 그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한한 공간에 가득 차서 안과 밖에 없으며 무궁한 시간에 사뭇 뻗쳐 고금과 시종도 없다. 또한, 크다, 작다, 많다, 적다, 높다, 낮다, 깊다, 얕다 시비할 수 없으며, 거짓·참 등 온갖 차별을 붙일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한 동그라미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도저히 그 전체를 바로 가르칠 수 없어 이것을 가르친다면 ‘입을 열기 전에 벌써 그르쳤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알거나 알지 못한 데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이치를 분명히 알면 팔만대장경이나 모든 성인이 소용없다.” 


법정이 일원상을 각하면 팔만대장경이 소용없다고 한 이유는 동서양의 천지창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250년경에 제작된 서양의 천지창조 모자이크를 보면 예수가 컴퍼스를 가지고 천지를 창조한다. 1824년 맨체스터 휘트워스 미술관 월리엄 블레이크는 <세계의 기원>에서 컴퍼스를 들고 있는 하느님을 그린다. 반면 동양의 천지창조는 <복희여와도>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천지창조를 위해서 남신인 복희는 컴퍼스를, 여신인 여와는 직각자를 들고 있다. 이는 만유가 일원상으로 이루어졌음을 상징한다.

강약진화로 평등세상을 이루자는

평등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일원 1상(평등주의 상): 원불교는 평등주의 종교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2편 교법 86. 일원주의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대종사님의 주의와 사상은 일원주의요, 대세계주의며 전체주의요, 전생령주의이다. 이는 바로 이 세계를 낙원의 세계, 평등의 세계,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천지창조를 컴퍼스로 표현했다는 의미는 일원의 평등주의가 원의 수학적 정의에서 입증된다. 수학적으로 원이란 한 점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의 좌표다. 모든 점이 원점으로부터 평등하다. 그래서 참가자의 신분이 평등한 회의를 원탁회의라 한다. 

원불교의 일원주의가 평등주의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일원상의 평등성에 있다. 세계 종교 중에서 가장 평등한 종교가 원불교다. 특히 남녀평등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다. 최고 의결기관인 수위단 회의나 교구장 구성에서 여성이 과반인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또한 재가교도와 출가교도의 평등성에서도 원불교가 최고인 이유 역시 일원상의 평등성에 있다 하겠다. 

 

 

원기108년 신년법문을 통해 전산종법사가 “강자와 약자는 함께 살아가는 은혜의 관계다. 강약 진화로 평등 세상 이루자”고 밝힘은 일원상 진리인 평등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 중곡교당

[2023년 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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