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살았으나 마음은 죽은 사람

육신은 살았으나 마음이 죽은 사람
먼저 원을 세워 「生心」 일으켜야


대동아 전쟁을 치룬 전후파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희망이 끊어진 민족의 고통을 배경으로 시를 써도 희망을 주제로 쓰고, 노래를 불러도 「희망가, 희망의 나라로」를 불렀다. 심지어는 학생들의 노트 표지에도 등대를 그리고 희망의 두 글자를 등장시켰다.


 이번에 동해안으로 잠입한 공비들은 삼겹 사겹 포위망 속에 정말 희망이 끊어진 참혹한 상황에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모한 생각으로 시작하여 무자비한 행동으로 끝을 낸 공비 사건은 부처님께서 악도 중생을 구제하는 두 바퀴, 지혜와 자비의 정신에 극한적으로 위배되는 비극을 연출한 것이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진로는 예측하지 못할 위태함이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가정! 희망이 예견되지 못하는 세상! 이는 종국으로 이끌려가 파탄의 결과를 보고 말 것이다.


 지난 이야기이지만 KAL의 창설자인 신용욱씨가 일생동안 꿈으로 이루려했던 항공사업이 마침내 무산 되자 비행장을 내려다 보며 스스로 목숨을 거둔 일이 있다. 자기의 절망을 죽음으로 청산한 신씨와 같은 사례는 지금은 더욱 확산되어 노인으로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동기에 의하여 행하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유의 모든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차마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도 헤아려 보아야 한다. 또 몸은 살아 있고, 생활은 남과 같이 하여도 숨을 죽이고, 기운을 죽이고, 마음까지 죽이고 사는 사람들, 이는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대종경 요훈품 12장에 「희망이 끊어진 사람은 육신은 살아 있으나 마음은 죽은 사람이니 살도음을 행한 악인이라도 마음만 한번 돌리면 불보살이 될 수도 있지만 희망이 끊어진 사람은 그 마음이 살아나기 전에는 어찌 할 능력이 없나니라. 그러므로 불보살들은 모든 중생에게 큰 희망을 열어 주기로 원력을 세우시고 세세생생 끊임없이 노력하시나니라」하셨다.


 대종사께서 희망이라는 용어를 법문에 많이 사용은 안했지만 여기에 표현된 희망의 뜻은 「生心」 「무엇이든지 이루어 얻고저 하는 마음」, 「제도 받기를 원하는 마음」 등의 의미로 말씀하신 듯하다. 좋은 감을 얻으려면 좋은 감나무를 먼저 얻어야 하고, 좋은 감나무를 구하려면 좋은 감나무를 접부칠 수 있는 자연 생 감나무를 먼저 얻어야 하듯이, 세상을 구원하려면 우선 사람을 제도해야하고, 사람을 제도하려니까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며, 마음을 다스리려면 마음이 일어나야 능히 다스릴 수 있다.


 희망이 끊어진 사람의 심상은 「스스로 안분할 수 없는 불안, 스스로 재기할 수 없는 무력」에 깊히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마음을 살려 일으키는 일이 요긴하며, 희망을 강연히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정승도 제 싫으면 안 한다」는 말과 같이 먼저 원이 서야 한다. 조건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하여 희망을 놓는 어리석음만큼은 피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이란 깨어있는 꿈이라」고 했다. 마음이 깨어 있고, 현실적인 노력만 있으면 모든 희망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백운화상은 「바랄 희(希) 자는 온갖 재앙의 근원이라」고 한 바도 있어서 실로 희망이란 욕심에서 출발한 것은 기필 실패할 것이요, 진정한 원력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야 실을 거둘 수 있다.


 수도인의 입장에서도 희망이 끊어지면 곧 중근에 머물고 형식적인 수도 생활에 그칠뿐 참으로 그 영성이나 심법에는 향상과 진급의 수도가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참 수행자는 언제나 불보살께서 모든 중생에게 큰 희망을 열어 주시려고 원력을 세우시고 노력하시는 그 심공과 같이하는 평화스러움과 너그러움을 보이는 것이다.


대종교 공부 = 趙正中 교무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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