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터 뷰 =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장 文山 金正勇 종사

화해제우지 인연 영원토록 간직하고
河海같은 은혜에 보은하는 나날 다짐
 『정산종사님은 우리 一圓大道 회상의 法母시요 制法主이십니다. 스승님의 거룩한 생애와 위대한 사상은 한국사회는 물론 세계 그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님의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에 정성을 다해 河海와 같은 은혜에 만에 일이나마 보은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의 중임을 짊어진 文山 金正勇(호적명 三龍, 72)종사.
 훤칠한 키에 걸출한 풍채를 갖춘 文山회장은 고희를 넘긴 노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청년의 기백을 느끼게 하는 건강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복덕에 연유함이겠지만, 교법에 바탕한 종교적 심성 수련과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는 자신관리의 자연스런 결과가 아니겠는가.
 문산 김정용 종사는 작년 4월 12일 제59회 임시 수위단회에서 정산종사 탄백 기념사업회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문산 종사가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花海 만남의 인연
 후천개벽의 主世會上인 우리 원불교의 창립은 주세불이신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와 개벽계성이신 정산종사, 두분 스승님의 만남으로 비롯되었다. 두분 부처님의 만남은 찾고 찾아주신 역사적 필연의 만남이었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두분 성자께서 최초로 만남의 성적을 나투었던 花海성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문산 김정용 회장이 태어난 것이다.
 『정산종사께서 저 멀리 경상도 성주땅에서 구도역정을 벌이며 찾아오시고, 소태산 대종사께서 중앙자리를 비워놓으신 후 전남 영광에서 찾아 나서시어 정읍 화해리에서 해후하시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두분 스승님의 만남이 없었던들 오늘날 우리 교단이 어찌 있겠습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요』
 정산종사가 전북 정읍군 북면 화해리 마동마을을 찾은 것은 원기 3년(1918) 봄. 당시 전라도를 중심으로 세상에 풍미했던 普天敎를 돈독히 신앙했던 莖陀圓 金海運(경타원 김해운) 선진이 「경상도에서 온 異人 한 분이 전주 大院寺에 머물고 있다」는 풍문을 전해 듣고 體陀圓 具南守(체타원 구남수) 선진과 더불어 대원사를 찾게 된다. 대원사에서 정산종사를 만난 김해운씨는 정산종사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싶은 발심이 절로 나고, 정산종사도 무슨 숙연이 있었던지 쾌히 응해 정읍 화해리로 거처를 옮겼던 것이다.
 『우리 조모님(김해운)께서 내 어릴 적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달님같이 얼굴이 맑았었느리라.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는데 어찌나 부드럽고 자비스러웠는지……」. 조모님께서 생전에 내게 들려주신 정산종사님에 관한 얘기 서두는 으레 「달님 같았느니라」로 시작하곤 했답니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역사적 첫 만남은 원기 3년(1918) 4월 방언공사를 시작한지 불과 한달 남짓 뒤의 일이었다. 팔산 김광선 대봉도와 함께 도보로 무장 고창 흥덕을 지나 정읍 화해리 金道一(문산 회장의 부친)家를 방문하여 역사적 만남을 이뤘던 것이다.
 정산종사 정읍 화해리에 얽힌 이야기는 『정산종사 법어』 기연편 7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정산종사 구도 일념으로 전라도에 방황하실 제, 정읍 화해리 金海運이 뵈옵고 크게 기쁜 마음을 내어 집에 청하여 알뜰히 공경하며 시봉하더니, 드디어 그의 집에서 대종사와 만나시니라. 후일, 학인이 여쭙기를 「화해리에서 대종사님 만나시기 전에는 종종의 이적을 나투셨다 하오니 어떠한 공부의 결과이오니까」 대답하시기를 「내가 그 때는 도를 몰랐기 때문에 부질 없는 일이 나타났으며, 혹 때로 나도 모르는 가운데 이상한 자취가 있었을 따름이니라」
 그곳 화해리에는 원기 71년(1986)에 중앙문화원(당시 원장 凡山 李空田 종사)이 교단 중요 사적지 기념비 건립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花海際遇地碑(화해제우지비)」가 동네어귀에 우뚝 서 있다. 문산 김정용 회장과 그 친형인 亞山 金仁龍 대봉도 형제가 태어나기도 한 「金道一家」는 지금도 보존돼 있어 80여년전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두분 스승님의 만남의 역사를 말없는 가운데 증언하고 있다.
 추원보본의 정성 다하자
 『정산종사님은 대종사님 열반하신 후 일제 말기에 우리 교단이 해체위기의 가장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물론 그후 8·15해방과 6·25동란의 와중에서도 위대한 법력과 대자대비의 경륜으로 이 교단을 굳건히 지켜주셨을 뿐 아니라 모든 교서와 제도의 기초는 물론 원광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기관을 설립하는 등 교단 만대의 기초를 세워주신 참으로 존경하는 스승님 이십니다』
 문산 회장이 정산종사를 처음으로 뵈온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란다. 정산종사가 총부를 다녀서 영광으로 가시는 길에 화해리를 들르신 것이다.
 『이틀을 머무시다 가셨는데 말로만 듣던 성현을 처음으로 뵙게 된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가슴이 마냥 두근거렸지요. 처음 뵌 인상은 키는 크지 않으신데 안면이 둥글둥글 하시어 모자람이 없는 모습이셨습니다. 엄하시지도 않았고 다정다감하게 미소를 지으시며 웃으시는 모습에서는 정감이 무한정 흘러 넘치셔서 자꾸 옆에만 있고 싶어서 일부러 그 어른 주위를 얼쩡거렸고 무슨 심부름이라도 시키시면 좋아라고 뛰어다니며 얼른 얼른 해 드리곤 했답니다』
 정산종사의 주위를 맴돌며 정신적 성장의 자양분을 길렀던 그가 이제 오늘날 교단의 원로선진이 되었고, 스승의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을 앞장서서 추진하는 기념사업회 회장이 되었으니 역사의 수레바퀴가 쉬임없음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산종사께서 스승이신 소태산 대종사님께 바치신 不二의 절대신성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만대사표이셨습니다. 원기 4년(1919) 가족이 경상도 성주에서 영광으로 이사 오시어 겪으신 말못할 간난 속에서도 온가족이 한결같은 믿음과 법열로 새 회상 창업에 無我奉公하도록 이끄신 생애 또한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지요』
 문산 회장은 정산종사 가족이 떠나온지 80년이 가까워지는 오늘날 성주성지가 새롭게 성역화되고, 성주를 비롯한 영남지역 일대에 정산종사가 널리 드러나서 교화가 크게 일어나기를 염원해 마지 않는다고.
 『同源道理, 同氣連契, 同拓事業 즉 「한울안 한이치에 한집안 한권속이 한일터 한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스승님의 삼동윤리는 우리 조국인 한국을 통일시키고 나아가 21세기 세계 인류에게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큰 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조실 앞에 석장을 짚고 서 계신 정산종사의 모습을 비롯 여러 장의 정산종사 사진을 직접 촬영했던 문산 종사는 『틈나는대로 정산종사의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린다』고 술회한다.
 정산종사의 생애와 사상을 널리 드러내는 학술대회를 서울·대구·익산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정산종사의 생애를 소설화하며, 일생을 다큐멘터리로 엮어 널리 홍보한다는 기념사업 계획도 좋고, 정산종사 추모 성가합창, 미술 「한울안전」을 비롯 각종 예술문화 활동도 기대된다.
 성주성지 성역화의 기초가 내실있게 이뤄지고, 「정산종사를 닮자」는 신성운동이 기쁨속에 확산되며, 「마음공부 잘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되라」는 정산종사의 최후 유촉법문을 실천하는 신앙운동이 이 사회에 미쳐진다면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는 교화발전에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위로 大山上師님과 左山종법사님의 뜻을 받들고 정산종사의 훈도를 직접 받은 凡山 李空田종사를 비롯한 좌우 동지들의 폭넓은 자문에 큰 기대를 걸며 재가 출가 모든 호법불자들의 절대적인 합심합력과 일반사회의 적극적인 관심속에 기념사업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기념사업회 조직이 교정원과 一元化되어 있고 孝山 趙正勤 교정원장이 상임부회장을 맡고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기념대회가 3년 앞으로 성큼 다가온 만큼 기념사업 추진에 만전을 기해야겠습니다』
 교단과 사회를 아우른 활동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의 선봉에 나선 문산 김정용 회장은 원광대 총장을 역임하는 등 崇山 朴光田 종사를 보필하며 오늘날 원광대 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로만 하더라도 교단적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오랫동안 수위단원으로 재직하면서 교단정책의 발전에도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문산 회장은 교단적 인물에만 머물지 않았다. 원광대 총장의 직함으로 활동하며 출중한 인격과 외교, 뛰어난 언변과 폭넓은 인간관계로 전북 지역은 물론 더 나아가 한국사회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사회적 인물이 되었다.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서울평화교육센터 이사장을 역임하며 姜元龍목사를 비롯한 걸출한 종교인과의 깊은 교유로 한국 종교계에 우리 교단의 위상을 확립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금년초에 개최된 '97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전라북도 범도민후원협의회장을 맡아 대회 기간 중 젊음을 더욱 실감하기도 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문산 종사는 익산문화권의 연구로 한국고대사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 특히 한국미륵신앙의 연구에는 一家를 이루었다.
 특히 정산종사가 「이 나라에 태어남을 첫째 가는 기쁨」(정산종사 법어 기연편 7장)이라 했듯이, 문산 회장의 나라사랑도 남달라 3년전에 『동방의 등불 한국』이란 역저를 내기도 했다.
 그외에도 문산 종사는 『익산문화권의 연구』, 『한국미륵신앙의 연구』, 『창조를 위한 여백』 등 여러 저서를 갖고 있다.
 한국 전라도 농촌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화해제우성지」의 佛緣에 바탕해 성실과 克己로 교단과 사회에 기여하는 입지전적 인물이 된 문산 김정용 회장이 사은님의 가호속에 더욱 큰 지혜와 정력과 용기로써 나아가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기를 염원한다.
송인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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