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難題 수습 앞장선 一圓회상의 작은 거인"

덕망·역량·실행 두루 갖춘 사업계의 주역
일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일해온 큰 생애
 『一圓大道 회상의 전무출신으로서 대과없이 교역을 마치고 정년퇴임을 맞게되어 감개가 무량합니다. 모든 것이 다 소태산 대종사님을 비롯한 역대 스승님과 부모님의 은혜임을 깊이 느끼며 감사드립니다』
 지난 26일 중앙총부에서 여러 법동지들과 함께 정년퇴임 봉고를 한 禮山 李喆行종사(69). 「勇將이 不如智將이요, 智將이 不如德將」이란 말이 있는데, 예산 이철행 종사는 용과 지와 덕을 두루 겸비한 인물로서 용기보다는 지혜를, 지혜보다는 덕성을 더 많이 갖춘 불보살이 아닐까.
 단아한 풍채에 잔잔한 미소, 부드러우면서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예산종사. 그의 出家와 전무출신의 길은 家門의 깊은 佛緣으로 이미 약조된 길이었다.
 道山 대봉도의 次男
 예산 이철행 종사는 후천개벽의 새 회상 창립기에 사업계의 큰 주역이자 고매한 인품을 겸전하여 후진들의 사표가 되었던 道山 李東安대봉도와 觀陀圓 全貞觀玉정사의 5남4녀 가운데 차남으로 일찍이 이 회상에 참예하게 된다.
 구인선진 가운데 한분인 일산 이재철 대봉도가 3종숙이 되고, 水德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응산 이완철 종사가 숙부가 되는 예산 이철행 종사.
 「일산, 도산, 응산 諸賢을 비롯하여 원불교 동량인재가 속속 배출한 동시에 더욱이 全門 일족 남녀가 본교 창립기에 전부 신봉자가 되었으니 李門과 본교와는 지중한 인연이 되었으므로 이 家譜가 곧 본교의 敎史와 큰 관련을 갖게 되었으니 그럼으로써 더욱 感祝을 難禁하는 바이다」
 이글은 수 많은 전무출신을 배출한 咸平 李氏의 가보(家譜)서문으로 정산종사가 직접 찬한 글이다. 이 서문만 보더라도 예산종사 집안이 원불교 창립사에 차지하는 높은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부락에서 태어나 자란 예산 이철행 종사는 14살때 삼례과원(현 수계농원)을 확보한 부친 도산 대봉도의 주선으로 익산총부 부근인 삼례 수계리로 이사해 왔다.
 『어릴적에 소태산 대종사께서 신흥에 몇차례 다녀 가셨을텐데 별 기억이 안나고 생생한 기억은 14살 되던 원기 26년 당시 일입니다. 그러니까 아버님 열반하신 바로 전날, 어머님과 함께 총부 조실에 불려갔을 때지요. 정세월·최상옥 두분 선진이 「동안선생이 살아 나셨다. 재생잔치 열어야 겠다」며 춤을 추다시피 조실로 들어 오셨는데도 종사님께서 보시고는 「그래 살면 좋지」하시는데 별로 반기시는 빛이 없으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섭섭한 마음이 났었는데…. 대종사님께서는 우리 아버님이 회생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아셨던거지요. 벽장에서 별사탕을 내 주시며 먹으라 하시는데 먹을 맘이 없었어요. 조실에서 나와 어머니와 함께 산업부에 계신 아버님께 갔는데 우리를 보시고는 고개를 돌리시고 그 다음날 돌아 가셨어요. 대종사께서 「우리 교단의 전 힘을 들여서라도 가는 동안의 생명을 구할 수 없느냐」며 애통해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지라 대중이 다 울음바다가 되었었지요』
 고아들을 돌보고
 숙부 응산 이완철 종사의 인도로 전무출신을 발원, 이리보화당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원기31년(1946) 오늘날 원광대학교의 前身인 唯一學林이 개설되자 입학한 예산종사는 가정형편상 졸업을 1년여 앞두고 고향 영광으로 내려가 잠시 교직생활을 하였다.
 그는 원기38년 응산종사의 연원으로 다시 出家, 6·25동란 중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수용한 이리보육원의 총무로 근무하게 됐다.
 『교단에서 시립애육원을 인수받은 후 정성을 쏟아 극도의 곤란은 모면하였으나 그 당시 경제사정이 어려워 연료가 없어 설익은 보리밥을 먹이고 긴긴 겨울밤에 마루바닥에서 잠을 재우게 되니 오줌을 싸고 싼 오줌이 얼어붙어 걱정이 태산 같았지요. 조실서 응산님과 함께 「사회적인 문제가 되면 어쩔까요」하고 정산종사님께 말씀드리니 「애들이 몇이냐」물으시고 「3백명이 넘습니다」사뢰니, 「사심없이 그 일 할수 있느냐.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하늘이 아는 것이다(천록이 있다는 말씀). 백명이 넘는 수에 일원대도가 대회상이니 그런 일 없을 것이다. 천심으로 하면 천록이 나온다」시며 기운을 밀어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넣어 주셨어요. 총부에 갈 때는 힘없이 자전거를 끌다시피 하고 갔는데, 돌아올때는 힘이 났었어요. 다음날 이리시청을 찾아 사회과장과 시장을 만났는데 6개월 특배(특별배급)를 받았어요. 양식과 석탄, 매트리스(침구)를 지원받아 이리보육원이 정상화 되었어요』
 代이은 보화당 창립의 주역
 교단 초창기 사업계의 큰 주역으로 普和堂 창설에 앞장섰던 도산 이동안 대봉도, 원불교 최초의 산업기관인 보화당은 영육쌍전·이사병행·제생의세의 이념을 구현하고 공익사업의 기초를 닦으며, 중앙총부의 유지후원과 교단의 각종사업을 밑받침하는 등 교단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또한 교단의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니, 이 모두가 도산 대봉도와 공산 송혜환 대봉도를 비롯한 창립선진들의 혈심혈성에 기인한 것이다.
 예산 이철행 종사는 원기48년부터 이리보화당의 부이사(부사장) 겸 총무로 봉직하면서 보화당의 한약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친 도산 대봉도가 창설한 보화당을 대를 이어 중흥발전시킨 것이다.
 이리보화당 부이사로 6년여 근무한 예산종사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여자수도원의 기본재산이 된 서울보화당을 원기 55년에 설립하여 사장으로 4년여 근무했으며, 원기57년에는 이리보화당이 이리시 발전으로 변두리에 위치하게 되자 이리 중심지에 역전보화당을 설립했다.
 이어 중앙총부의 유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원기61년 전주시 다가동에 전주보화당을 설립하여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 경제적인 숨통이 되었다.
 이외에도 교정원 각부의 사업을 돕기위해 각종 후원회에서 생산기관으로 세운 부산·대전보화당과 대구·부산원광한의원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예산종사는 25년간 보화당의 중흥발전을 책임진 주역으로서 교단의 대표적인 산업기관이며 한약업기관인 보화당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종사님의 근본 가르침인 以小成大의 교훈을 어기지 말아야 합니다. 막연한 신심만 가지고 사업을 해서는 안되지요. 반드시 합리적인 사업진단으로 장래를 미리 예견해 보고 철저한 기업 경영과 관리가 우선시 돼야 하겠지요』
 서울회관 건립의 대역사 이루고
 예산종사는 오늘날 수도 서울의 원불교를 대변하는 서울회관 건립 과정에서 파생되었던 「남한강사건」 때 누란의 위기를 원만히 수습하여 교단의 명예와 경제파탄을 지켜낸 주역이었다.
 원기56년 개교반백년 기념대회를 마치자마자 꿈에 부풀어 있던 서울회관 건립은 원래 13층 설계의 건물이었는데 4층 골조공사에 그친채 중단되고 말았다. 서울회관 건립건으로 은행에 담보됐던 서울교당과 경남(현 부산)교당이 서울회관 건립의 수포와 함께 은행에 넘어갈 난제에 봉착했다. 해방후 전재동포구호사업의 보상으로 불하받은 두 교당의 존폐는 엄청난 재산적 손실일 뿐 아니라 한국사회에서의 교단 위상에 치명적인 문제였다.
 예산 이철행 종사는 남한강 수습대표위원이 되어 이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여 서울·경남 두 교당의 재산권을 지켰으며, 서울회관을 교단의 소유로 확보하기 위해 호안매립공사 등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당시 大山종법사께서는 「하늘에 告하여 진실로 반성하면 교단운영의 거울이 될것이다」며 재가출가 모두의 일심합력을 촉구하셨어요』
 이후 예산 이철행종사는 5년간 서울회관 건립추진 집행위원장으로서 서울회관 건립을 위한 재기공식을 올리게 되었고, 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비롯한 재가출가 전 호법동지들의 합심합력으로 서울회관을 완공하고 원기67년 10월 역사적인 봉불낙성식을 올리게 했다. 실로 12년간에 걸친 대인고의 정성으로 쌓아올린 금자탑이었다.
 예산종사는 서울회관이 완공된 후에도 서울회관 관장직을 맡아 6년간 봉직하였다.
 『그러한 시련과 고통이 있긴했지만 우리 교단이 2천여평에 가까운 한강변의 땅을 확보한 서울회관을 갖게된 것은 大山상사님을 비롯한 우리 교단구성원 모두의 합심합력으로 이루어낸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남한강사건을 비롯, 교단의 크고 작은 난제의 수습위원으로 그 해결에 앞장서 일했던 예산종사, 그는 분명 우리 一圓회상의 작은 거인이 아닐 수 없다.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 야기되는 난제들을 헤쳐나가는데 선봉이 된 그는 『우리 교단은 어떠한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울이 되고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확연히 신념으로 알게 되었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교정원장 등 교단요직 두루거쳐
 교단의 얼이자 최고결의기관인 수위단원으로서 총부서울사무소장, 교정원장(원기73년부터 3년간), 감찰원장(원기76년부터 3년간) 등 교단 요직을 두루 거친 예산종사, 그는 원기 73년, 교단창립 제2대말 성업봉찬회 결산시에 대봉도의 법훈을, 원기76년 소태산 대종사 탄생백주년 성업봉찬기념대회를 기하여 종사법훈을 서훈했다.
 원기79년 12월부터 정년퇴임시까지 만2년간 사회복지법인 삼동회 이사장으로서 교단 자선복지사업의 발전에도 한몫을 담당했던 예산종사는 작년에 자선복지화보집 『한울안 한가족』을 간행할때에도 앞장서 교단 홍보에 기여케 했다.
 『복지기관 운영은 국고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만큼 교리정신에 바탕한 운영으로 모범적인 복지기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파트촌에 위치한 종합사회복지관은 도의문화가 스며드는 간접교화의 장이 되어야 하겠고요』
 동산수도원에서 대종경 모임공부
 『헌옷 벗고 새옷 입는 기분으로 내생길을 개척하고 준비하는 기간으로 삼겠습니다』
 정년퇴임 후에도 예산종사는 삼동회 이사장 시절부터 생활해온 동산수도원에 계속 머물며 새 생활을 설계하고 있다.
 퇴임후 자칫 나태하기 쉽고 기운이 가라앉기 쉬운 노인들의 생활에 활력을 불러 일으키는 영산·변산 등 성지참배와 등산도 1주일에 한 두번 함께하고 있다. 며칠전에는 충무 통영 등 충무공 유적지를 단체로 돌아보며, 교당 부지를 매입했거나 신축중인 옥포·고성·신현교당 등 현장을 찾아 교무(후진)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또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 매일 오전 9시~10시 한시간 동안 대종경 모임공부도 한다.
 전무출신을 발원하고 예비교역자가 되어 기숙사에 입사, 남녀동지가 모여 모임공부를 하듯 일생동안 교역에 힘쓰다 내생길을 준비하는 모임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세속노인들이 둘러앉아 화투나 치고 장기나 두는 것과는 사뭇 다른 우리 선진들의 수도인으로서의 자랑스런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현실을 즐겁고 보람있게, 넉넉하고 여유있게 살려고 합니다. 일하느라 급하게 뛰어온 만큼 이제는 동지들과 더불어 마음공부를 더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산수도원 식구들 가운데에는 요즈음 흰머리가 다시 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平地造山의 교단 창업기, 일많고 고단한 역사의 연속, 그가운데 공부심을 놓지않고 덕망과 역량을 겸비한 사업계의 주역으로 일해온 예산 이철행 종사.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한다」는 좌우명으로 남모르는 가운데 속깊은 修身의 적공을 쉬지않고, 어려운 동지와 이웃을 살피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던 지나온 생애.
 님의 여생에 법신불 사은의 은혜 더욱 가득하고 永生에 불연이 거듭 중하길 심축드린다.
송인걸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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