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믿으면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어요 

대종사님의 가장 매력적인 면모는 의사의 할 일을 당신 일이 아니라 하시고, 병 치료를 가장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의사한테 미루신 점이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셨다. 전지전능하시고 만능을 구비하신 당신의 힘으로 하지않고 선진님들 고생시키며 새 회상을 여신 것이었다. 나는 대종사님과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연히 마음을 정하고 救我의 길을 여기서 찾기로 했다. 나의 아호를 귀지헌(歸之軒)이라 자호한 것도 이 때의 결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총부를 다녀온 후(원기63년 10월) 나는 매일 교전공부에 열심이었다. 성가를 제외하고는 교전 불조요경 예전 법어 교사 등을 읽고 노트에 요점을 정리하고 이리저리 표시를 해가며 사통오달을 검증(?)했다.
이런 줄도 모르고 柳교무님은 안달이 나신 것 같았다. 「교당에 나와달라」는 주문과 강청이셨다. 나는 낮에는 근무중이었고 예회날은 모처럼 일요일이라 할 일도 많았지만, 나오시는 교도님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 수도 없어 나가질 못했다. 그해 11월 중순쯤 저녁무렵 교당에 들렀다.
혼자 교당을 지키고 계신 교무님이 무척 반기셨다. 가난한 여염집처럼 을씨년스런 기분이 솔솔나는 단층 슬라브집이었다.
장엄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간소한 불단에는 아취형 창문 판대기에 그린 검정색 일원상만 뎅그렁이 모셔있었다. 불상숭배가 아니어서 참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선 채로 합장하여 예를 올리곤 교무님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 교무님은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내시려는지 아예 나의 입교식을 그 자리에서 올리시는 것이었다.
大山종법사님이 친제하신 법명을 받은 터라 「달리 무슨 의식이 있을까보냐」 하는 찰라에 교무님은 내게 주실 교도증까지 준비하고 계셨다. 성가를 부르고 축하해 줄 대중도 없는 텅빈 법당에서 교무님은 식순대로 어김없이 입교식을 진행하셨고 나는 시키는대로 불단에 네번 절한 후 보통급 10계문을 받고 발원문을 읽었다. 교도가 된 것을 법신불전에 고백하고 특별한 신심과 발원으로 공부 사업에 정진할 것을 서약했다.
집에는 교당에 나간다는 말없이(허락할리 없었기에) 나가게 되어 나는 처와 처가가족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영원한 장래에 죄고의 종자를 키우느니 그 마음병(아직도 못고치고 있지만 내게는 기울어지는 병, 등한시하는 병, 편착하는 병이 있다)에 교법이라는 약재를 써보겠다고 醫王(법신불)이 계신 병원(교당)에 환자(교도)로 등록을 한 것이었다.
육신병 치료하는 시원찮은 의사에게 『함께 새 세상의 일꾼되자』고 추켜주신 교무님 말씀에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교도증을 받았으니 인정된 교도였다. 이른바 초입교도 초심자로서 예회날에는 다른 일 모두 제치고 나가기로 했다.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불안했지만 아무 준비없이 나간 첫 법회는 숨 쉴 틈없이 빠르게 진행됐다. 서먹서먹한 채로 부지런히 따랐다. 두번 가는 사이에 20여명 교당의 창립요인들과 맹렬교도님들을 익힐 수가 있었다. 정도관 김제원 김성정 양해립 황경원 김광연 신명덕화 김선보화 오경도행 송윤수 양화선 조상섭 이성원 강승호 등 내 입교당시의 쟁쟁한 교당 멤버들이었다.
12월 명절대재날이었다. 柳교무님은 난데없이 초입교도인 나를 재주로 임명하시곤 전무출신전 고축문을 낭독하게 했다. 기존 교도들이 의아하여 웅성거렸다. 교무님은 재를 마친 후에야 나를 공식적으로 소개하셨다. 입교하자마자 나는 낙하산 인사를 타고 고축인이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고 교당의 요인으로 승승장구의 길을 나갔다.
〈제주교당, 제주교구 교의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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