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에도 구별이 있다. 우와 치이다. 같은 어리석음인데도 치에는 「병들어 누울 녁(疒)이 들어있다. 병적인 어리석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불가에서는 이 어리석음(痴)을 욕심(貪)·성냄()과 함께 삼독(三毒)이라 불렀고, 우리 회상에서도 이들을 삼십계문의 구경에 두어 크게 경계하였다.

「일상수행의 요법」의 두 번째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서 자성의 혜(慧)룰 세우자」중의 어리석음도 「치의 어리석음」이다. 삶의 현장에서 병적인 어리석음을 공부삼아 제거함으로써 지혜광명을 솟구쳐 일으켜야 한다.

어떤 사물에 대하여 인간이 어리석을 때가 있다. 새로운 지식 혹은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어리석어진다. 지식이나 정보를 받고도 파악자체가 잘못된 경우도 그러한데, 평소에 사물에 밝지 못하여 어리석다는 말을 드는 사람도 흔히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으로 빚어진 일이 개인에 그치거나, 거기에 고의나 악의가 발견되지 않으면 애교로 덮어주는 것이 사회 인심이다.

이는 「우」를 가리키는 말인데, 서가모니회상에서는 어리석은 반타가가 「나는 왜 어리석은가」란 화두로 살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알면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한 가르침」(요훈품 6)은 이에 통한다.

문제는 「치」인데, 대중을 어리석은 자로 보는 어리석음이다. 혼자 영리한 사람은 국가경영을 맡기면 국가와 국민을 고통에 몰아넣고, 기관이나 단체의 책임을 맡기면 공중에 해를 미치게 된다.
세상의 두가지 어리석음을 「제 마음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면서 남의 마음을 제 마음대로 쓰려는 사람」과 「제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까지 간섭하다가 시비 가운데 들어서 고통받는 사람」(요훈품 16)으로 밝혀주신 대종사의 법문을 시대의 경책으로 받아지켜야 한다.

타력 염불신앙에서 보면 내가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조그마한 「지혜」가 어리석음(痴)에 돌아가 부처님께 의지하면 구원의 길이 열린다. 중생성취(衆生成就)가 보살의 길이요, 부처의 길인 셈이다.
그것은 새회상의 창립기에 혼신을 다하면서도 오직 대종사께 신명을 다바친 정산종사의 삶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통일이라는 민족의 숙원앞에서 겪고 있는 국난(國難)에 처하여 교단과 기관, 재가출가 교도들 모두의 각성이 필요하다. 이 만큼 교단을 키워준 사회에 우리가 보답할 차례이다. 정산종사 탄생백주년사업도 같은 뜻으로 이룰 큰 불사(佛事)이다. 이런 새회상에서 우자도 안타까운데 치자까지 되어서야 이를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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