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없다

“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없습니다. 인생을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태도로, 자기의 직무에 진지하게 도전하고 자리이타 생활을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지난 2월6일, 이날은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이 미타산 아래의 조그마한 시골학교에서 어렵게 어렵게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는 날이다. 아니 이들이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도해온 노원경 교장(서진주교당)의 퇴임식 날이다.

학생·학부모·교사 모두 울어버린 첫 졸업식

졸업생들에게 훈사를 하는 노 교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들이 강당을 메우고. 원경고등학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창기를 일구어온 산 증인이기에 오히려 졸업생들보다는 교직원들 사이로 ‘훌쩍임’이 급속히 번져갔다.

그의 눈가에는 지난 4년간의 모든 일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70이 넘은 노구에 교단의 부름을 받고 첫발을 디뎠을 때의 황량함이나, 자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아이들이 한 밤에 창문이란 창문은 다 부수고도 모자라 절규하던 모습이며,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양호실에서 박영훈 교감과 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잠을 청하던 일, 그리고 특성화 교과목으로 시작한 철인3종부가 전국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던 감격 등등.

약 력
1926.10.8 경남 함양군 지곡면 출생
1945.3.31 진주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1945.3.31~11.30 금호 동부 공립 국민학교 훈도
1953.3.31 일본대학 법학부 정치경제과 졸업
1960.10.1~1962.3.31 마산대학 법정부 강사
1963.3.1~1964.1.4 진주교육대학 전임강사
1964.1.5~1987.12.28 진주교육대학 교수
1987.3.1~1991.2.28 진주교육대 학장
1992.1.6~1995.12.31 신경남일보 논설고문
1996.3.2~1998.2.28 진주교육대강사
1998.3.1~2002.2.28 원경고 교장



그러기에 그는 “원경고등학교에서 보낸 지난 4년이 평생의 교육자 생활 중 가장 의미있는 날들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밝힌다. 또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인성지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 전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참으로 값진 시간이었다”고 교육관을 피력할때면 영락없는 우리들의 선생님 모습이다.

그렇다고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도권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포기한 아이들이기에 그만큼 교육에 어려움이 따랐고, 또 어떤 때는 회의감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 시작한 것이 화장실 청소와 담배꽁초 줍기. 밤그늘이 아직 걷어지기도 전에 일어나 화장실 청소를 하고, 담배꽁초를 줍고 다녔다. 이것을 본 아이들이 처음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볼일만 보고 얼른 자리를 피하다가, 뒤에는 자기들이 먼저 와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노 교도는 이것을 “학생들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화장실 청소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교무님의 말씀을 듣고 시작한 일이다. 복 받으려고 한 짓이다”며 맘 좋은 할아버지처럼 활짝 웃는다. 그의 이런 소탈스러움은 학생들에게는 엄한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시골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다가선다. 또 교직원들에게도 말없이 뒤를 살펴주는 자상한 아버지 같다고나 할까!

솔선수범과 자애로움으로 어울린 4년,

교육자 생활 중 가장 의미 있는 시간


그래서 어느 넉살 좋은 아이는 그가 교장실을 문을 열고 나서면 저쪽 복도 끝에서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아빠! 나 보희”하고 인사를 한다. 그러면 그는 “이놈아, 아빠가 뭐냐. 앞으로 할아버지라고 불러라”며 응답을 하기도. 이것은 억지로 꾸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대로 나오는 것이다.

교직원들과 회식이 있는 날이면 그의 인기는 짱이다. 다른 때는 어울리지 않던 여선생들도 이때면 모두 따라 나선다. 그리고 한 가족처럼 어울려 함께 노래도 부르고, 또 춤을 추자면 함께 나서 춤도 춘다.

특히 그의 “건배 제의는 일품이다”고 박영훈 교감은 귀띔한다. “춤은 잘 추냐”는 질문에 “덩실덩실은 한다”며 파안대소 한다. “교장을 의식하지 않는 학교가 건강한 학교”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4년 동안의 원경고등학교 생활 중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첫 졸업생을 배출하던 날. 원기84년 3월에 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들 중 4명이 4년제 대학에, 그리고 2명이 2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차마 고등학교 졸업도 생각 못한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다 보니 그 감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자리는 본인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 때 참 보람을 느꼈다”며 회상에 젖는다. 또 “개교한지 2년이 지난 후, 스승의 날 졸업생 10여명이 카네이션을 들고 찾아 왔을 때도 그 감격은 이어졌다”고.

노 교도와 교직원들과의 신뢰, 그리고 원경고에 대한 애정은 강당을 지을 때 잘 나타났다. 강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해 그는 교직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모든 교직원들이 매월 15만원씩 20개월간 적금을 부어 강당 건축에 보탰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동떨어진 이야기고, 거짓말 처럼 들릴 것이다. 이것은 서로간의 신뢰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며 “교육은 역시 봉공정신과 희생정신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표본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생을 교육계에 투신해온 노 교도는 신앙심 깊은 아내 덕에 원기58년도에 입교했다. 그리고 서진주교당 교도회장과 경남교구 2대 교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항상 감사생활과 교리에 바탕해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는 노 교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그의 넉넉한 그늘이 있기에 철부지 아이들도 맘껏 뛰어놀며 커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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