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쉬는 법, 생각을 깊게하는 법

성리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 가장 쉬운 방법은 자성원리와 우주원리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이 우주는 어떤 원리로 이루어져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의문들은 의두요목의 주된 내용이며 수많은 수행자들이 치열하게 탐구해온 주제이다.

수많은 화두중에서 한국 불교의 경우 ‘이뭣꼬’가 많이 사용되는 화두중의 하나였다면, 요즘 시중에서는 인도의 구루마하리쉬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있는 것 같다.

반면에 원불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제일 많이 사용하는데 ‘이뭣꼬’가 자성을 밝히는데 특징이 있다면, ‘만법귀일 일귀하처’는 모든 문제의 귀착점인 근본 원인을 밝힘과 동시에 한 걸음 나아가 처음 한 마음을 잘 내도록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어 보인다. 그 때문인지 원불교는 마음공부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은 쉽게 얻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연구하는 주제가 인간과 세계의 근본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탐구는 각 종교나 문파들로 하여금 여러 수행방법을 발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불교를 비롯한 여러 수행단체들이 가지는 수많은 수행방법은 아마도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각을 쉬는 것과 생각을 깊게하는 것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생각을 쉬는 것은 우리가 좌선할 때 생각을 쉬는 것처럼 모든 망념을 쉬어 한 생각도 나지않는 심처에서 자성을 철견하는 것이며, 생각을 깊게하는 것은 우리가 좌선후에 의두연마를 하는 것처럼 근본문제에 대한 연구를 치밀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중국 선종에서 묵조선과 간화선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의지가 강한 사람은 생각을 쉬는 공부에, 연구력이 뛰어난 사람은 생각을 깊게 하는 공부에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원불교는 이 두가지를 병행하지만 선후를 따지자면 생각을 쉬는 것이 먼저라 할 것이다. 그것은 ‘성품은 한 생각 나기 이전 소식(一念未生前)’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깨침을 추구하는 데에는 생각을 쉬는 것이 빠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을 쉬는 것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활용하여 의심을 지어가는 공부라 할 수 있다. 이는 간화선으로 대표되는데 여기에는 여러 의심건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간화선이란 말 그대로 ‘어떤 이야기(話)를 본다는(看) 것’으로 이는 선사들의 선문답과 같은 옛 이야기가 전제되어 있다. 그 문답은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간화선은 화두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를 요구한다.

모든 의식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아래 두고 모든 잡념을 하나의 생각으로 뭉쳐서 하루 24시간은 물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화두를 놓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잡념에 의해서 화두참구가 방해받지 않는 가운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뚫고 성품의 경계에까지 그 연구심이 도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쉬운 수행법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화두에 의심이 잘 걸리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이다. 잘하면 대장부 일대사를 해결할 수 있지만 억지로 화두를 들면 심장의 화기가 두뇌쪽으로 상승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는 위험도 있다.

그 결과 일각에서는 수행자가 전생에 들던 화두를 알아내어 그 화두를 주어야만 모름지기 선지식의 자격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선지식의 지도아래 잘 참구하면 의외로 쉽게 해답을 얻는 것이 간화선이다. 어떤 선지식들은 사람이 깊은 우물속에 빠져서 오로지 밖으로 나갈 궁리만을 간절히 하는 것처럼 화두를 참구한다면 화두의 타파는 3일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전에서 말하는 ‘사흘의 마음공부가 천년의 보배’라는 말은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생각을 쉬는 좌선과 의두연마 등으로 생각을 깊게 하는 수행을 병진하고 있다. 우리의 수행법이 조화로우면서도 수승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땀흘려 하는 수행으로만 증명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교무,경남교구 와룡산 수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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