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도 교무ㆍ덕진교당
어느 날 거리 담에 벽화를 그리는 학생들을 보면서 무보수로 환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요, 조각가이다. 오늘의 나 자신은 수 십 생을 통해서 그리고 조각한 모습이다. 종이에 그린 그림은 잘못되면 다시 그릴 수 있으나 자신 모습은 고치거나 다시 그릴 수 없다. 다만 신앙과 수행을 통해서 다듬어 질뿐이다.
현재 나의 모습은 내가 수많은 과거 생으로부터 이 순간까지 마음과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그려놓은 작품이요, 결산의 모습이다.

심신으로 그리는 ‘나’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쉼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없는 생을 윤회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때로는 선한 그림을 그려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도 하고, 유익하게도 하며, 때로는 악한 그림으로 모든 사람들을 괴롭게도 하고 아프게도 하게 된다.
생명이라는 백지장 위에 그린 그림은 잘못 그려져도 지우거나 없애거나 버릴 수 없으며 또한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노력과 땀으로 지혜롭게 그려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21년간 그리시고 다시 그려서 주세불 성자로 성화를 완성하셨다. 석가모니께서도 오백 생이라는 많은 생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시고 다듬어서 6년 설산 사생 자부로 성화를 완성하셨다.
대종사님께서 그리신 그림은 법설이 되어 수많은 중생들을 깨우쳐 주었고, 성신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림은 인류의 길잡이가 되어 바른 길로 인도해주셨다.
부처님 미소 앞에 서게되면 한없이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일체 사심이 제거되어 자비로운 본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성화는 맑고 깨끗한 영성과 큰 빛의 직관으로 그려진다. 고요한 정신과 지혜로운 판단력으로 그려질 때 성화, 명화, 동화가 그려진다.

영생토록 성화를 그릴 터
나는 자신의 그림을 기쁨과 은혜, 봉사와 감사로 그리고 있는지 반조해 본다.
어느 날 화가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서 그림 전시회를 갖기로 했다.
화가 A는 새싹이 파릇파릇 소생하고 생명이 약동하는 봄동산, 녹음이 짙게 우거진 여름 풍경, 가을에 추수하는 어느 농촌마을을 화폭에 옮겨 전시장에 진열해 놓았다. 그런데 화가 B는 아무 그림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답하기를 “여기 가져왔습니다. 자, 보십시요”하면서 창문을 활짝 열어 초여름 녹음동산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내가 전시한 작품”이라고 했다.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대 자연의 세계를 그대로 전시했다는 말이었다. 화가 C는 “내 얼굴과 내 모습, 그리고 나의 인간됨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자신의 모습은 수많은 과거 생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기 몸과 마음·행동을 통해서 그려놓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세 사람의 작품을 통해서 어떤 작품을 그려야 할까?
성화를 그릴 때에는 정신과 마음·생각·뜻이 물같이 깨끗하게, 바람같이 신선하고, 일월같이 영롱할 때 나 자신의 그림은 성화로 완성될 것이다.
바쁘고 힘들게 사는 생활이지만 나 자신이 그리고 있는 작품과 조각을 살피고 다듬어서 성스럽고 아름답고 천진스러운 명작으로 그려보고자 한다. 좋은 작품으로 부족함 없이 영생을 다복하게 하는 성화를 몸과 마음으로 완성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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