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소나무 사이로 향기로운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낯을 간지럽게 한다. 물이 가득 찬 저수지의 표면은 고기 비늘처럼 반짝이고 산에는 단풍이 물들어 간다.

내가 사무실로 나가기 전에 우리 부부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자주 들러는 이 곳 청풍공원은 시가지를 한 참 벗어난 곳이어서 공기가 참 맑다. 비교적 건강한 나는 확연하게 느끼지 못하지만, 병약한 아내는 시내의 공기와 이 곳 공기는 사뭇 다르단다.

우리 부부는 공원 나무아래를 말없이 거닌다. 어느 새 이 같이 낙엽이 쌓였을까. 낙엽을 밟다가 머리를 들어 나무 가지를 본다. 어떤 나무가지는 거의 잎이 붙어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음양상승 한다더니 어느 새 양의 기운은 음의 기운에 밀려 가고, 음의 기운이 승하여 나무의 이파리를 떨구어 냈다.

겨울이 지나면 차츰 양의 기운이 힘을 타서 새 잎이 피어나고 꽃이 피리라.

인간 세상사, 강약도 상승 하는 것, 영원한 강자 없고, 영원한 약자 없다. 제행무상이라 하던가. 벌써 나무 잎이 졌다. 우주 만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우리 부부가 밟고 지나가는 낙엽 속에서 성주괴공의 진리를 본다. 나무 잎새가 싹트고 자람은 성이요, 한참 무성함은 주요, 떨어짐은 괴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로 돌아감은 공이 아닌가.

신경성 고혈압과 식욕부진, 무기력으로 시달리고 있는 아내의 체중은 불과 35킬로그램, 괴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일까.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내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 없다. 온 몸의 힘이 다 빠져 힘겹게 걷는 아내는 늘 내가 함께 있어주기를 원한다. 내가 곁에 없으면 더 괴로운 모양이다. 애별이고(愛別離苦). 사랑과 미움이 없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별리의 고통이 없을 것이고 미운 사람과 만남의 고통도 없으련만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고 미움을 버리지 못하기에 이별과 만남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짊어져야 하는 멍에다. 그렇기에 지나친 애착이나 원착은 우리 영혼의 자유를 속박하게 된다.

인류의 영원한 존속과 영혼의 존재를 믿는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면 사람의 죽음은 새 출발을 의미한다.

노자는 <노아이생(勞我以生)> 삶은 힘드는 것으로써 하고 일아이로(佚我以老). 늙음은 편안함으로써 하고 식아이사(?我以死). 쉼은 죽음으로써 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생사일여라 하지 않던가. 지나친 애착은 버리자. 저 바짝 마른 아내의 육신은 그 마음과 영혼이 담긴 그릇이요, 감싼 옷이다. 언젠가는 저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그 영혼은 내 곁을 떠나리라. 그 영혼은 자유로워야 한다.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 그 어느 쪽이나 담담하게 맞이 할 수 있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필경 사람의 생로병사는 춘하추동으로 변해 가는 과정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먼저 타계하신 부모형제의 생각이 난다. 흘러간 세월은 겹쳐만 가도 게절의 바뀜에 따라 그리운 마음, 애틋한 정은 새로워 질 뿐이다. 모두 내 뇌리에 살아 있음인가.

노경에 이르러 조락의 가을, 병약한 아내와 더불어 공원의 낙엽을 밟고 지나가게 되니 많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저 떨어져 가는 잎새 뒤에서 종일토록 노래하던 매미들은 다 어디로 가고, 차츰 노란 빛으로 변해가는 풀숲에서 울어대던 개구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나무가지에 잎이 무성해지고 길가에 시들어 간 풀들이 우거지게 되면 매미는 또 노래하고 개구리들은 또 울어대리라.

그러나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시들어 가는 저 육신의 옷을 벗어 던질 때, 그 영혼은 어디로 갈까.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한국문인협회회원, 서광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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