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세진 교무 / 울산교당
내겐 해마다 이 때쯤이면 찾아오는 작은 행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겨우내 잠들었던 나무들에서 터져 나오는 신록의 싱그러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봄비에 먼지가 씻겨나간 건너편 산자락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신록의 찬란함을 발견했던 때부터 그 신비로운 매력은 늘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만들었다. 어떤 화가도 온전히 표현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그 빛은 푸르면서도 윤기 있고, 여리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몇 년 전부터 봄이 되면 풍란과 콩란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신록의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선인장도 본래자리로 돌려보낸 적이 있어 무엇을 기른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생명력 넘치는 그들을 가까이 두고 싶은 욕심에 이것저것 재지 않고 시작하게 되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잘 되지 않았다. 물을 많이 줘 뿌리가 썩기도 하고, 물이 없어 잎이 말라 떨어지기도 했다. 풍란의 성질을 모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에 조급증이 나서 풍란을 가만 두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상태가 조금 이상한 듯 하면 이 쪽으로, 저 쪽으로 옮겨 심다가 끝까지 기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풍란 입장에서는 무척 피곤했을 것 같다.
그러나, 올해도 어김없이 풍란과 콩란을 구했다. 올해는 모양새 있는 돌도 미리 마련하는 등 신경을 더 썼다. 돌을 씻은 뒤 두 란을 적당히 얹어 놓고 실로 고정시켰더니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쪽에 취미가 많은 듯 알 것이다. 짧지만 그래도 경험이라고 얻은 것이 있어 처음 얼마간을 비닐로 씌워두는 등 바뀐 환경에 적응하도록 노력도 했다.
전과 비교해서 제일 많이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풍란의 뿌리가 생각처럼 뻗어가지 못하더라도, 콩란이 말라서 검게 변해도 조급증을 일으켜 이리 저리 옮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치하지도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서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한다. 풍란에 대한 조급증이 잦아드는 것과 비례해 내 마음을 바라보는 여유도 많이 생긴 듯 하다. 인정되지 않는 마음을 꽉 잡고 어떻게 해보려고 혼자 씨름하기보다 다만 그런 마음인 줄 알고 바라보는 여유.
올 해 시작한 풍란은 조금 있으면 1개월이 된다. 아직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자리를 잡았다 해도 끈을 아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다. 경계를 따라 끄덕 없을 때도 있지만 외줄 타기하는 아슬아슬함을 맛볼 때도 있다. 종종 바닥에 툭 떨어지기도 한다. 아프긴 하지만 그냥 다시 줄로 올라간다. 풍란이 환경에 따라 기르는 법에 차이가 생기듯 내 마음도 경계따라 제 각각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더라도 결코 공부심을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풍란과 내 마음, 묘한 매력이 있다. 올 해는 왠지 풍란이 잘 자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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