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선교소 양동수 교도

추석인 11일, 기자는 연원교당인 녹동교당(교무 이심진)을 챙기기 위해 3시간의 먼 빗길을 나선 여수교당 교무진(최세종·최원심)과 함께 동행 취재에 나섰다.

최 교무는 녹동교당에 도착하여 이모저모를 살피고 녹동교당의 모태가 된 소록도를 찾아 이곳의 유일한 한센병 교도인 양동수 할머니(85, 호적명 분례)를 찾았다. 가지고간 과일과 간고등어, 전 등을 냉장고에 채우며 이들은 재회를 기뻐했다.

출가…그러나 ‘아, 한센병!’
영광군 덕호리 출신인 양 교도는 대종사 생전 출가를 꿈꾸며 18살 때 영산에서 공양원 생활을 시작했다. 양 교도는 함께했던 도반으로 박은국, 전이창 원로교무를 기억했다.

3년째 근무를 하고 있던 무렵 득병했으나 전조증상에 대해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당시 조만식 교무(조전권 종사의 언니)가 양 교도를 데리고 익산의 보화당과 광주의 용하다는 병원을 갔지만 병이 낫기는 커녕 병명조차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귀가해 있던 중 25살 때 대종사님 열반의 소식을 들었다. 극구 말리던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등의 동생집에 간다는 핑계로 익산을 향했다. 밤엔 황등의 동생집에서, 낮엔 총부의 빈소에서 장례가 끝날 때까지 함께 했었다. 그것이 ‘종사주님에 대한 보은’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양 교도는 박장식 원로교무의 증언으로 알려져 있는 발인전 대종사님 빈소의 방광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종사주 어른의 성신(聖身) 주변이 불이 난 것처럼 환했어요.”

잊혀진 세월 반세기
이후 양 교도는 6·25 이듬해인 1951년 33살의 나이에 소록도로 격리되어 반세기 넘게 살아오고 있다. 소록도 사회의 구조상 잠시 기독교에 귀의했던 양 교도가 원불교를 다시 만난 것은 현재 아프리카 교화를 하고 있는 김혜심 교무가 소록도에 왔었던 원기62년(1977)이었다. 이후 이운숙 교무시절에도 교류를 하기는 했었지만 소록도라는 배타적이고 특수한 지역상황 때문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3대 교무인 양세정 교무가 부임하면서 옛 고향인 원불교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양 교무와는 고향이 같고 먼 친척뻘이었던 것. 양 교무는 정성껏 ‘성안(聖眼)을 뵌’ 양 교도를 ‘모셨고’ 양 교도도 농산물을 교당에 희사하는 등 모녀처럼 다정하게 짧은 시절을 보냈다. 중국 훈춘에서 교화를 하고 있는 양 교무는 지금도 명절이 오면 양 교도에게 전화하여 안부를 묻곤 한다.

오은도 교무(모스크바교당) 시절, 양 교도는 소록도의 육지통로인 녹동에 교당 만들 것을 권했다. 한센병이 소멸성질환이라 소록도가 10∼20년 후면 나환자촌으로서의 역할을 중단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 교무는 여수교당을 연원으로 하여 녹동교당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오 교무의 도움을 얻어 총부 나들이도 했고, 수도원에 들러 옛 도반들도 만났다.

소록교당과 녹동교당의 교무들을 딸처럼 여기고 이곳을 거쳐갔던 교무들이 한번씩 들르면 차비하라고 쌈짓돈을 꼭 쥐어주기도 한다.

구름에 가리워도 달은 본래…
인생의 첫 문을 열고자 했던 원불교, 난치병을 얻었으나 대종사님에 대한 보은의 도리를 다하고 원불교를 비롯해 세상과 멀어졌던 양 교도. 그러나 한 평생 맺힌 한이 소록도에 교당이 열리며 입가의 미소로 변해가고 있다.

구름에 가리웠어도 한가위 보름달은 휘영청 소록도 하늘에 떠있듯 양 교도의 마음 깊숙이엔 출가와 ‘종사주 어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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