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슬람의 저항

미국 참사는 그 배후에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거대종교가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야기한 이번 사태가 종교간의 갈등을 넘어 문명의 충돌로 확대될 것인가는 미국의 공격 강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이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지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9월 11일 미국심장부를 강타한 희대의 끔찍한 사건은 여전히 전 세계에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몇 일 전 부시대통령은 전 세계에 미국 편에 설 것인가 테러리스트 편에 설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고(?) 나섰다. 만일 미국 편에 서지 않으면 경제제재 조치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몰살시킬 것만 같은 기세이다.

테러가 ‘정치적 목적이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공포에 빠지게 한다는 의미’라면 미국의 이러한 태도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테러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양자 택일이라는 위험한 발상이 21세기 다원화시대인 현재에도 경제적인 부를 등에 업고 내세울 수 있다는데서 9월11일 사건만큼의 큰 충격을 받게된다.

물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테러행위 자체의 극악무도함은 더 이상 무엇으로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과연 이 사건을 ‘이슬람의 테러 대 미국’의 구도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헌팅톤의 문명 충돌론이 재등장하면서 양 구도로 몰고 가려는 세력이 피어오르고 있는 차에 헌팅톤교수는 독일 한 주간지와의 회견에서 “이번 사태는 문명충돌은 아니고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했다. 즉 문명에 대한 야만의 도전이라고 한다. 서방우월주의의 관점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모태는 서구의 문화와 문명이 비서구의 그것 보다 훨씬 우월하다는데서 나온 발상이다. 어느 문화나 문명이든지 탄생 자체가 지닌 특이성 때문에 서로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름에 우월성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은 다름 아닌 문화 제국주의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부시가 보여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양자선택의 제시도 같은 맥락의 문화 우월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발상임을 알 수 있다. 문명충돌론이나 문화우월주의식으로 나간다면 이번 사건의 본질을 놓치게 되기 십상이다.

왜 이슬람은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 테러는 무언의 절규다. 부시행정부가 들어서면서 8개월 동안 보여준 외교는 일방주의 일색이었다. 중동정책은 타협과 조정이 아닌 이라크공습이라는 군사행동으로 바뀌었고, 친이스라엘 정책등 편파적 외교노선은 ‘신고립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반요격 미사일(ABM) 협정, 포괄적 핵실험금지 협정, 교토 지구온난화 의정서 등 굵직굵직한 양자·다자간 국제협약에 미국은 등을 돌렸었다. 미국의 이러한 일방적인 오만함은 테러참사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자국의 위상을 공고히 다져나가고 있다는 데에서 더욱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 동아시아권에서 갖고 있는 이슬람교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인 시각도 서구에 의해 조장된 것이다. 예컨대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란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대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스콜라철학의 대부격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각색까지 되어서, 그렇기 때문에 항상 테러를 저지른다는 말까지 덧붙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진정한 이해는 오늘날 세계 140개국에 12억 신자가 있고 점차 증가추세에 있다는 현상에서 읽을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문명이 번갈아 출몰했다. 슈펭글러나 토인비 같은 문명론자는 한 문명의 가장 이상적인 존속기간을 1000년으로 잡으면서 이슬람문명을 가장 역동적인 문명으로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슬람문명은 이미 1400여 년이나 존속되어 나름의 값어치를 과시해 왔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대안문명’으로도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미래론자들은 이슬람문명을 21세기에 있으리라고 보는 이른바 ‘문명충돌’의 주범으로 지레 짐작하고 크게 경계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뉴스위크에서는 사회복지가 가장 발달된 나라들로 구성된 유럽에서 왜 이슬람들이 증가하고 있느냐는 특집을 다룬 일이 있다. 여러 가지 증가요인 가운데서 첫 번째가 평등사상을 들고 있다. 이슬람의 평등정신은 지위고하는 물론이고 인종적 국가적 혈연적 지역적 차별을 두지 않는다. 알라신 앞에서 절대평등은 형제애와 연결되어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 등 사회생활의 전반, 즉 문명의 제 영역을 총망라한 인간의 생존양식이며 종교와 세속 양방을 모두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를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본을 무너뜨리고 있는 실체가 미국이라는 것이 이슬람의 시각이다. 예컨대 그들이 성지로 여기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주둔시켰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도 그들끼리 두면 해결이 되는데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경제적인 전폭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든지 아랍 이슬람 문명권에 지속적인 군사적 정치적 간섭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일방적인 문화 우월 주의나 문명충돌과 같은 왜곡된 시각으로 몰고 가서 이번 사건의 원인과 본질이 가려지게 되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는 이 지구상에 살상의 테러는 영원히 근절시킬 수가 없게된다. 우리 모두 다름의 시각을 배워야한다.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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