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과 위험한 전쟁

지난 9월 11일 미국의 맨하탄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무역센타 쌍둥이 빌딩이 비행기 테러에 의해 사라졌다.

그 날, 미국에 테러가 막 일어났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FM라디오를 즐겨듣는 큰 아이로부터 전해 듣고 TV 방송을 줄곧 지켜보았다.

연기가 솟고 있던 첫 번째 빌딩에서 옆으로 두 번째 빌딩을 향해 민간항공기가 충돌하는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걱정이 되어 맨하탄 교당에 전화를 몇 번 돌렸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시 뉴욕교당에 전화를 하니 교구장님이 받으셨다. 안부를 여쭙자 모두 안전하다는 말씀을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통화가 이어지던 중 2번째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시면서, “이 일을 어쩌나∼”하는 숨가쁜 탄식이 전화선을 타고 전기에 감전되듯 전해졌다.

불타는 빌딩엔 연기가 치솟고, 여러 사람들이 창문에 몸을 의지하여 구조를 요청하며 옷가지를 흔들다 끝내는 떨어지는 광경이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그리고 늦도록까지 워싱턴, 펜실베니아의 소식들이 이어졌다. 그날 밤, 무고한 귀한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냈으리라.

왜 이렇게 참혹한 테러가 일어난 것일까? 이번 테러의 결과에 앞서 그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중심주의의 발상에서 이루어진 자연정복, 식민주의, 절대적 배타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어렸을 때 미국인이라면 항상 친절하고 매너 좋은 사람들로 어려움에 빠진 나라에 수호천사처럼 나타나 도움을 주었던 너무나 친절한 ‘우리의 이웃’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미국 위스콘신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호수 주변이 미국 개척시절에 희생된 인디안들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서구 유럽은 중세 이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발견’이란 미명하에, 아시아, 아프리카, 북남미를 찬탈하였다. 미국에 들어온 유럽인들이 펼친 서부 개척역사 또한 ‘개척정신’이란 미명하에 수 천만명의 인디언 원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결과로 이루어졌다. 1·2차 세계대전과 최근에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은 참혹한 인류역사에 대한 진정한 자각과 참회가 없는 한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패권주의의 상징이었고, 이스라엘과 유럽간의 갈등과 전쟁을 야기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간에 충돌하는 중심에 서 있었기에 테러 대상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번 테러사건은 인류의 침략의 역사에 나타난 냉혹한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문명의 충돌》을 지은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이번 테러는 전세계 문명사회에 대한 ‘야만의 공격’이다”라고 말하였지만, 현재의 상황은 문명의 충돌과 함께 위험한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다. 더 큰 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실을 풀어나가지 못할 경우, 새 천년에 새로운 문명사회를 기대하기보다는 문명간의 충돌과 참혹한 전쟁으로 인류는 비극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간인에 대한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를 응징하고 근절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를 위험하게 편가르기하고 있다. 죠지 부시는 미 의회 연설에서 “이것은 미국만의 싸움이 아니라 세계의 싸움이고 문명의 싸움”이라고 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의 편인지,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인지 선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부시의 이러한 위험한 편가르기는 테러에 대한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문명간의 전쟁을 야기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군에 비유하고 ‘무한 정의’(infinite justice)를 내세우는 논리는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에서 200년 동안 빚어진 중세 십자군 전쟁의 참혹성을 다시 야기할 수 있음을 경계하게 한다. 인류의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으로선 이번 사건이 오로지 테러범과 미국의 축소되고 절제된 구도로 그 파장이 축소되길 바란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에서 밝혔듯이 강자는 약자에게 서로 이롭도록 하는 법을 쓰는 것이다. 힘센 형이 약한 아우를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약한 아우는 형과 우애를 나눌 수 있다. 미국은 상처받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무력보복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인류역사를 바라보고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헌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하면서, 남북 종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얼마나 서로 다른 이웃종교에 대해 무지하였던가를 자각하게 된다. 한스 큉이 말한 대로 “종교간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어린왕자가 자신의 별나라에 하나 뿐인 꽃을 온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우리들 마음속에 하나뿐인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꽃을 심고 가꾸는 마음이 필요하리라.

인간중심주의의 발상에서 비롯한 자연정복과 절대적 배타주의를 넘어서 자연을 존중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이 성숙할 때, 인류사회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될 상보적 관계로서 조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한국종교인평화회 사무차장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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