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친견제자 특 별 좌 담 (II)

▲ 전 이 창 원로교무
▲ 송 자 명 원로교무
▲ 송 영 봉 원로교무
▲ 김 성 주 원로교무
▲ 전 팔 근 원로교무
▲ 박 현 일 원로교무
▲ 유 장 순 원로교무
▲ 정 윤 재 원로교무
▲ 이 성 신 원로교무
▲ 사회 한정석원로교무
본사에서는 6월 추원보본의 달을 맞아 21일 중앙총부 법은관에서 대종사를 친견한 원로교무 17인을 모시고 특별좌담을 실시했다. 게재순서는 당일 발표순서를 따랐다. --편집자주
17인의 원로교무가 5월21일 중앙총부 법은관 대회의실에서 좌담하고 있다.

사회 : 한정석 원로교무

6월 추모의 달을 맞아 대종사님을 친견한 소중한 선진들을 모시고 대종사님 법문을 받들 수 있게 된 것은 후진들로서는 큰 영광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대종사님을 뵈온 첫 인상과 성인다운 모습, 그리고 대종사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말씀을 전해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예타원 전이창 원로교무

열여섯 어린나이에 처음으로 영산에서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선진포 나루까지 나가 걸어오시는 대종사님께 모두가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때 ‘아 이 어른은 정말 천상에 계시는 분인가 보다’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대종사님께서 이름을 물으시길래 “이창 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옆에서 “이창이는 제 법명이 안좋다고 한답니다”했다. 그러자 “반창이라고 할거나, 영육을 같이 창성시키고 공부와 사업을 같이 이루어야지 한쪽만 이룰 것이냐? 이창(二昌)이 참좋다”하셨다. 어른의 말씀이라 두말없이 그대로 받들었다.

원기26년 내가 열일곱 되던해 총부에서 전국교리강연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생사대사’에 대한 제목을 갖고 최연소자로 참석했다.

“세상에 살때에는 인간대사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알았는데 더 큰 생사대사가 있음을 알게 해주신 분이 대종사님이십니다. 영생을 통해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렇게 강연을 끝내고 대종사님께 큰절을 올렸다. 대종사님께서는 “오늘 저 조그만한 아이의 입에서 생사대사의 진리를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하시며 특등을 내리셨다.

또한 “꼬리날까 싶다”고 하시면서 경계의 말씀도 해주셨다.

제타원 송자명 원로교무

원기25년 4월 중앙총부에서 대종사님을 뵙게 됐다. 대종사님은 “조그만 것이 전무출신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 뭣하러 왔냐?”하시기에 “일제중생을 제도하러 왔습니다”하니 “제법 통통한 소리를 하는구나”하시며 얼마후 사랑 자(慈) 밝을 명(明)으로 법명을 내리셨고 하단교당(현 당리교당) 공양원으로 가게됐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었고 내면의 갈등 못지않은 외부로부터의 유혹이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일본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일본에 갈 꿈을 꾸고 있을 당시 원기27년 대종사님께서 부산에 오시어 “여기 온지 3년이 되었지? 나에게 할말이 있거든 해봐라”하시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일본가려고 하지? 일본에 갈 생각 말아라. 일본은 곧 망한다. 이번 겨울만 고생하면 총부로 데려가마”하셨다.

공회당에서 야회를 볼 때 대종사님께서 “내가 지금 이리(익산)시내 사람을 다 불러 오라면 불러올 수 있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법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승타원 송영봉 원로교무

대종사님은 엄부와 자부를 겸하신 어른이셨다. 한번은 서대원 선생이 산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자 금방 태산이 쪼개지도록 엄한 꾸중을 내리셨다.

어느 해 여름으로 기억된다. 문을 다 열어놓고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가 막 흔들어 깨웠다. 대종사님이 그곳을 지나시다가 당신이 깨우면 행여라도 내가 놀랠까봐 식당의 관숙이를 불러서 “놀래지 않게 깨워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토록 엄하신 분이 세세곡절 자비로움으로 깨우쳐주시는가 싶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3개월 선에 참석했을 때, 한분이 성리를 설한다고 연상에 있는 물주전자의 물을 칠판에 끼얹었다. 그랬더니 대종사님께서 “과거에는 성리도 격외법문으로 하면 법이 높다 했지만 앞으로는 대를 소로 만들고, 소를 대로 만들줄도 알고 유무를 돌려도 보고 전체를 다뤄야한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입선인들을 둘러보시고는 “욕심이 많은 사람은 탁한 기운이 뜨고, 진심이 많은 사람은 붉은 기운이 뜨고, 수양이 잘 된 사람은 수정같이 맑은 기운이 뜬다. 삼학팔조 공부를 통해 기운을 잘 단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영육쌍전을 설명하시면서 대중이 못알아 들으니 “내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간다”하시며 “저것들이 언제 철이나서 내 말을 알아들을거나” 하셨다.

내가 12세 되던해 어머니는 영산에 오신 대종사님을 뵈었다. 대종사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셨고 “네 농주(弄?)입니다”하니 “왜 농주냐” 하셨고 어머니는 “얘가 용띠라 용은 구슬을 희롱해야 하는 것이라 해서 농주라 지었습니다”했다.

그러자 “아니다 성주(成?)라고 해라. 구슬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셨다.

또 어머니께 “성주를 잘 길러서 전무출신 시켜라”하시며 “얘들이 육대요령 공부만 잘 하면 큰 호강을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당시 내가 뵈온 대종사님은 이 세상 모든 일을 훤히 다 아시고 나의 속 마음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것만 같이 느껴졌다.

초등학교 졸업후 14세에 영산학원생으로 3년동안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아쉬웠던 일은 영산에 있을 때 대종사님께서 열반하신 일이다.

‘구슬을 이루라’고 하시며 법명을 지어주셨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총부에 가 뵙지도 못하고 영영 떠나셨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텅 빈것만 같았다.

아타원 전팔근 원로교무

나는 태어날 때부터 대종사님 슬하에 있었다. 그때는 총부 자체가 완전히 수양도량이었다.

5세때 부터 조실에 가서 늘 문안 인사를 드렸다. 대종사님께 큰절을 넙죽하고 나오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나는 지금도 대종사님이라는 호칭 보다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더 친근하다.

대종사님께서는 칭찬을 하실때 하늘로 올라갈만큼 큰 칭찬을 하셨다. 여고에 다닐 때, 어머니와 함께 밭에 나가서 딸기 모종을 하고 있는데 대종사님이 “팔근이 참 착하다 어떻게 네가 이렇게 착하냐? 앞으로도 큰 일 하겠다”며 크게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이렇게 알량한 노동을 하는데 큰 칭찬을 하시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통지표를 받으면 조실로 먼저 가서 보여드렸다. 대종사님은 잘했다고 칭찬하시며 과자를 주시곤 했다.

또 “공부 잘하는 애하고만 놀지말고 공부 못하는 친구하고도 같이 놀면서 네가 그애들 공부를 가르쳐 줘라”고 일러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굉장히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말씀해주신 것이었다.

내가 여고에 합격 했을때 “대종사님은 “네가 지금 진학하면 과학을 수준높게 공부 할텐데 네가 큰일을 하려면 과학뿐 아니라 늘 도학을 함께 해야한다”며 신신 당부하셨다.

어떻게 한사람 한사람을 그렇게 고루 살피셨을까. 역시 성인의 위대하심이다.

기타원 박현일 원로교무

원기28년 1월 숭산종사 결혼식날 총부에 왔다. 그당시 덕타원님(정양선 교무)께서 총부에 가자고 하셔서 대종사님을 뵈러 조실로 갔다. “아버님 양선이 왔습니다”하니 “응 양선이 왔냐? 하시며 문을 열고 나오셨다.

내가 인사를 올리고 나니 “조그마한 꼬마가 어디서 왔냐?”하시면서 “겁이 많은 것이 전무출신 하러 왔냐?”하시기에 속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이어서 “전무출신만 잘 하면 무량대복을 받는데 이 꼬마가 그 깊은 뜻을 알란가 모르겠다”하셨다. 그런데 덕타원님이 아주 일상적인 일까지 전부 보고를 하자 그 말씀을 들으시고는 하나하나 감정을 해주시고 처리건 까지 일러주셨다.

나는 속으로 ‘아무일도 아닌 것 같은데 저런 것 까지 세세곡절 보고를 하는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더욱 그립다.

한번은 우물가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데 대종사님께서 굽어다 보시면서 “네가 뭣을 할줄 아냐? 콩나물을 다듬냐? 부지런히 배우고 잘해라 그래야 성공하지”하셨다. 때때로 좌선을 하고 있으면 살며시 오셔서 조는 사람은 죽비로 살짝 때리고 가시곤 했다.

한타원 유장순 원로교무

원기26년 2월 구조실에서 대종사님을 뵈었다. 나는 “불법연구회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고 싶어 왔습니다”했더니 “너 입교는 했느냐?”라고 물으시며 ‘장순(壯順)’이라고 지어주셨다.

그런데 내가 “장순이는 싫어요”하니 “애기가 커서 어른이 되는 법이다. 장(壯)자는 양(陽)을 의미하고 남성적이며 강한 것이고 순(順)자는 음(陰)을 의미하고 여성적인 것이며 유(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장순이란 법명으로 외유내강을 겸한 큰 인물이 될것이다” 고 부연해 주셨다.

이렇게 해서 학원생활을 하고 있는데 집안에서 야단이 났다. 내가 총부에 있는 것을 알게된 셋째오빠가 수계농원에 일을 다니는 일꾼들에게 농원일을 해주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대종사님께서는 “너 가야겠다. 너 때문에 수계농원 일을 못한단다”하셨다. 하지만 나는 몇차례의 우여곡절에도 끝내 가지 않았다.

대종사님께서는 “너희는 단순해서 모른다. 선생이라고 무조건 믿지 말아라. 허물없이 대하지 말고 예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때인가는 “아무리 부모 형제 것이라 해도 보은할 힘이 없이 받으면 빚이 된다”고 하셨다.

흠타원 정윤재 원로교무

나는 출가를 하기 위해 영산으로 도망을 나와서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대종사님은 “집에서 반대하는데 어쩌려고 또 왔느냐?”하셨다. “어쨌든 시집은 안가고 살라고 왔습니다. 공부해서 대각성불 하렵니다”하니 “네 머리카락을 잡아끌고 가면 어쩌려고”하시길래 “저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 안갑니다”했다. 그랬더니 “네가 그렇게 마음을 결정했다면 식당에 있거라”하시고는 1년뒤에는 “정성껏 하면 성공 할 수 있으니 잘 해보아라”고 격려해 주셨다.

원기25년 4월 서울교당 공양원 생활이 시작했다. 2년동안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데 대종사님께서 오셔서 “그동안 애썼다. 그만 총부에 와서 공부해라”하셨을 때 감회가 깊었다.

13세 어린나이로 영산 동선에 참가하여 대종사님을 뵙고 법명을 받았다. “윤재, 네 이름과 같이 부지런히 공부해라. 그러면 훌륭한 사람이 될것이다”고 하셨다.

한번은 “어느 곳에서 무슨일을 하든지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빨래 하게 되면 빨래하고, 마당 쓸게 되면 마당도 쓸고, 밥 하게 되면 밥도해야 한다” 하시고 “너희들 나 없어도 살겠느냐?”하셨다. “살다가 뵙고 싶으면 가서 뵙지요.”하니 “멀리 수양가도 뵈어?”하셨다. 멀리 수양가신다는 말씀이 혹 어느 산중으로 들어가시려니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종사님의 열반을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성타원 이성신 원로교무

내가 총부에 왔을 때 겨울 동선을 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할 때 한 30여명이 모인 것 같았다. 그런데 대종사님이 들어오시더니 대중을 쳐다보시면서 “금년 동선에는 전국 각지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었구나”하셨다.

제일 많이 강조하신 법문은 “이 회상 만난 것이 제일 큰 일이다. 또 나 만난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며 이 회상과 대종사 만난 것을 유독히 강조하셨다.

또 우리 대중을 보시면 “너희들이 꼭 돼지같이 보인다”고 하셨다. 집에서 돼지를 키우면 예뻐서 키우는 것이 아니고 팔기 위해서인데, 팔려고 할 때 저것이 몇근이나 될란가 싶어 누어있는 돼지에게 밥을 주면 돼지는 자기 죽는 것은 모르고 밥을 주는 것만 알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다 이와같이 돼지처럼 보인다. 고 하셨다.

또 “범부중생은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니 “그것은 불구자란 소리다”하시며 “이치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니 이 공부를 시켜서 올바르게 만들어야 한다”하셨다.

한번은 “오늘 아침에 밖에서 ‘네 이놈’ 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 남천이가 불을 때고 있더라”고 하시며 “남천이를 불러서 ‘거기 네 이놈이 누가있어’했더니 남천이가 ‘이 마음속에 시기 질투가 들어서 이길려고 해봐도 못이기니 혼자 소리를 질렀다” 했다고 하시며 “남천이는 오늘 항마를 했다”고 말씀 하셨다.

3개월 동선때 ‘이차돈’과 ‘춘향전’등의 소설을 읽게 하시면서 ‘너희들이 독신 생활을 하는데 경계가 많겠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유혹을 잘 넘겼는가를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그러시고는 우리 정녀들에게 “너희들 세상이 궁금하겠지만 별것이 아니야”하시며 “한번 뜻을 세운 일에는 단단히 마음 먹고 이겨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리 정도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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