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미래의 희망을 품고 사는 파리교당

나는 원기70년 7월부터 만 5년간의 프랑스 유학에 이어 원기82년 9월부터 만 2년간 다시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국제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파리교당의 김신원 교무님은 집을 구하기 전 임시 거처인 호텔까지 찾아와서 보살펴 주셨다.

파리교당은 젊은 교당이다. 파리와 인근의 대학에 유학 온 학생들이 교도의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상계교당의 부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아직 40대 초반의 젊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파리교당 교도들의 선배 노릇을 해야 했을 정도이다. 김신원 교무님과 교도님들의 성원으로 파리교당 교도회장을 맡았으니 나는 교도회장 역할을 해외에서부터 시작한 셈이다. 나는 파리교당에서도 일요일에는 출장과 장거리여행의 예외를 빼고는 법회를 빠지지 않는 원칙을 지켜냈다. 젊은 교도들과 호흡하는 것이 매우 기뻤고 이들 젊은 교도들에게 마음공부의 길을 열어주는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젊은 파리교당을 더욱 젊게 만드는 요소는 김제영 교무님이 이끄는 사물놀이 패 ‘동남풍’의 존재이다. 주로 뜻 있는 학생교도들과 비교도들이 참여하는 이 사물놀이 패는 이제 파리지역은 물론 프랑스 전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놀이 패로 인정을 받고, 각종 축제에 초대받고 있을 정도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동남풍은 에펠탑 주변의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공연하면서 세계인의 눈길을 끌었고, 국내 방송사에서 앞다투어 취재하는 명물이 되었다. 한국이 경기하는 경기장 안에서, 그리고 그 주변에서 동남풍의 사물놀이 소리가 주목을 끌었음은 말할 나위 없겠다.

파리교당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 중 한 가지는 김신원 교무님의 역점사업인 가을철 김치 바자와 그 수익으로 전개하는 입양아 고국 방문운동 동참이다. 11월에 날을 잡아 토요일과 일요일 법회에 걸쳐 파리교당 교도들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김치 담그기에 나선다. 배추 500여 포기, 무 100뿌리 정도를 20명 정도가 둘러앉아 양념을 무치고 나면 허리가 아프지만 그 보람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리고 한인식당을 비롯해 주문한 교포들 집으로 배달에 나선다. 나는 OECD에 근무하는 일본인은 물론 몇몇 유럽인들에게도 몇 포기씩 판매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김신원 교무님은 물론 해외교화에 나서는 모든 교무님들의 꿈은 현지인들에게 대종사님의 법음을 전달하는 일이다. 이제 미국에서는 선학대학원의 개설과 함께 현지인 교화로의 큰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도 주로 현지 교포들을 중심으로 한 교화에 머물러 있다. 좌산 종법사님께서 염원을 담아 해외교화의 방편을 내놓기도 했지만 결국은 국내의 교도들이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파리교당의 경우는 파리 시내에 시민선방 형태의 선방을 하나 여는 것이 가장 큰 염원이다. 선방을 통해 현지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원불교 교리를 소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정교당 교도회장·경제학 박사: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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