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교화대상 두차례 수상한 화정교당

OECD 근무를 마치고 원기84년 9월에 귀국했다. 산업연구원 근무를 다시 시작하면서 이제는 집 가까운 곳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걸어서 1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에 있는 화정교당. 그 당시 3년째에 접어든 어린 교당이었지만 다른 교당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큼 복을 누리고 있는 교당이었다. 우선 인구 20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지하철 3호선 화정역에 바로 인접한 8층 상가건물이라는 위치부터가 그렇다. 서울교구 교의회 의장이신 건산 최준명님께서 건축 당시부터 교당으로 특별히 설계해서 희사해 주셨기에 시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리고 교화가 뒷받침되는 교당으로의 성장에는 성정진 교무님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5년 전 처음 문을 연 교당에 부임해서 전국의 교당들로부터 알음알이 교도들을 확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몇 몇 초창 교도들과 함께 매일같이 발이 닳도록 신흥 주택가를 도는 순교활동… 3년 뒤에 나가기 시작한 나에게는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본 화정교당은 아직도 어설픈 모습이었다. 원불교를 처음 다니기 시작한 곳이 화정교당인 교도들이 대부분이었고, 공부심보다는 서로 만나는 즐거움에 교당을 나오는 교도들도 상당수 있었다.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 교무님은 이렇게 커가기만 하는 화정교당을 공부하는 교당으로 만들도록 힘을 합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대뜸 교도 부회장을 맡아 달라고 하셨다. 우선 나원배 부회장과 함께 번갈아 가면서 법회 사회를 보게 되었고, 교구의 중요한 회의에 교무님과 함께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부나 교당활동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아직 힘겨워하던 교도들에게 마음공부가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당살림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우리들 교도들의 역할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경계하던 분들도 서서히 마음을 합해 주셨다.

이렇게 교무님과 교도님들이 마음을 합하여 공부에 힘쓰기 시작한 덕분인지 화정교당은 큰 복을 다시 받게 되었다. 원기85년을 결산하며 서울교구의 교화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서울교구 전체 교당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교도가 불어나는 교당이 되었다. 그 여세로 우리 화정교당 교도들은 이듬해인 원기86년 종법사님 신년 하례에 어른 66명, 어린이 33명 등 모두 99명이 나서게 되는 기쁨도 누렸다. 원기86년을 결산하며 두 해 연속으로 서울교구 교화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원기86년부터 교도회장을 맡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서울교구 교의회의 여섯명 부의장의 한 사람으로 역할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렇게 과분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내고 있는지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

<화정교당 교도회장·산업연구원 산업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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