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발로 쓴 이야기 고사

▲ 이리 비행장이 자리했던 현 김제시 공덕면 동자마을
원기27년 5월16일에 총부 대각전 예회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정의의 신념은 위대한 것이다’라는 제하의 법문을 하시었다. 이때의 법문을 대종사께서 법낭이라고 하였던 구타원 이공주 종사가 수필하였다. 이는 《금강산의 주인》(청아문총1)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번 서울에서 창기가 비행기를 타자고 권하기에 응락하고 모든 행장을 차린 후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처음 비행기에 들어가 앉으니 종이에 솜을 넣어서 귀를 막게 하고 할 말이 있거든 필담으로 하라고 연필과 공책을 달아 놓았는데 나는 창기와 마주앉고 옆에는 일본군인 세 명이 앉아 있었다. 프로펠러가 돌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는데 밑을 내려다본 즉 마치 대소쿠리속에 앉은 것 같았다. 그래서 창기에게도 안심 입정하라고 말하고 나는 정의의 굳은 신념으로써 사은전에 심고드리고 무사 통과할 것을 자신한 후 고요히 눈을 감고 선정에 들어버렸다.(중략) 얼마동안을 가다가 창기가 나를 흔들기에 눈을 뜬 즉 ‘부여통과’라고 쓴 것을 보여준다. 창기의 얼굴은 아주 창백한데 또 ‘이리통과’라는 소리가 아득히 들리며(나는 귀를 막지 않았다) 조금 지나서 목천포 비행장에 내려서 자동차로 보화당까지 무사히 오게 되었다.(중략)”

대종사께서 원기27년에 하신 법문이나 법문에 지난번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지난번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기27년과 멀지않은 시기였으리라 생각된다. 비행기를 대종사께 권해 같이 타고 온 ‘창기’는 묵산 박창기 대봉도로 법문을 수필한 구타원 종사의 아들이다.

경성일보사 소화17년(1942)도 연감에 의하면 소화11년(1936) 7월부터 신(愼)항공사업사의 설립을 보았고 경성(서울)-이리간 정기항로등을 개설하였고, 넘어 소화13년 5월14일부터 새로이 경성-광주간 매주3회의 정기왕복을 개시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항공수송은 1929년 일본동경에서 경성·대구·평양·신의주에 정기 우편물을 포함한 일반화물을 수송한 것이 효시이며 1936년 전라북도 고창출신인 신용욱(1901∼1962)에 의하여 조선항공사업사가 설립되었고 1948년에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었었다.

대종사께서 비행기를 타신 원기27년(1942) 인근은 일명 신항공사업사라 불리는 조선항공사업사가 운영하는 서울(여의도)에서 익산·광주를 주3회 운행하는 정기선이었다.

대종사께서 목천포 비행장에 내리시어 자동차로 보화당(구보화당)까지 가셨다고 하였는데 목천포 비행장이라고 말한 것은 이리비행장을 말한다.

목천포 비행장으로 불리운 이리 비행장의 위치는 현재 행정구역으로 김제시 공덕면 저산리 동자마을이다. 동자마을은 만경강 선창가 마을이라 해서 ‘구만창’이라 불리웠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익산군 오산면 ‘동자’에 속했다가 1930년대 만경강 제방을 축소하며 강을 정비하면서 김제지역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동자마을 강건너가 오산면이고 그 옆이 목천포이다. 동자마을 신기암(74세)씨는 일제 때 서울에서 이곳에 우편배달용 비행기가 내왕했다며 말한다. “예전에는 이 마을이 3가구가 살았습니다. 해방 후 한집한집 사람이 모여들어 현재는 31가구가 살고 있어요. 내가 어릴 적 비행장에 가서 놀며 심부름도 했지요. 그때 보면 우리집 앞 저기 논 앞으로 해서 활모양으로 비행장이 있었고 사무실은 저쪽에 있었지요. 비행기에 내려서 40여분 정도 쉬었다가 광주로 가는데 조수가 프로펠러를 먼저 돌려서 엔진을 살려 날아갔지요. 그리고 여기 제방으로 자갈을 깔아 차들이 제방을 따라가 목천포 다리를 건너 이리로 갔지요. 이 인근에서는 구만창 비행장이라고도 하고 우리 마을을 비행장 마을이라 불렀지요.”

대종사께서 비행기를 타신 원기27년경은 일제 말기로 일본의 언론탄압정책과 경제의 핍박으로 인해 《회보》가 정간되었던 시기인지라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영보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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