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인 기도봉은 여여한데····

영산성지 전경. 왼쪽부터 ①설레바위봉 ② 현재 기도하고 있는 상여바위봉 중턱 너럭바위 ③ 상여바위봉 ④ 옥녀봉
⑤ 현재 영산원불교대학교에서 기도하고 있는 변화된 마촌 앞산봉 ⑥ 마촌 앞산봉 ⑦ 촛대봉. ⑧ 장다리봉 ⑨ 중앙봉 ⑩ 대파리봉 ⑪ 눈썹바위봉 ⑫ 공동묘지봉 ⑬ 밤나무골봉



기미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갈 때, 영광지역은 3월14일 전라남도 내에서 광주에 이어 두 번째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영광지역에서는 10여 차례에 7천6백여명이 참여하였고, 사상자 6명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상 또는 일경에 체포되었다.

영산에서 방언공사가 완성단계에 접어들 때 쯤 ‘독립지사들과 유대나 위조 지화를 박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등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어 퍼져나갔다. 일경들은 구간도실을 샅샅이 조사해도 혐의를 잡지 못하자 소태산 대종사를 영광경찰서로 연행하여 1주일간 조사하였다.

대종사는 영산으로 돌아와 분함을 참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전국의 만세 운동은 새 세계의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 소리다. 우리는 바쁘다. 어서어서 방언공사 마치고 기도 드리자”고 하였다.

필자는 영광경찰서에 들러 옛 기록을 찾아보려 했지만 한국전쟁 때 경찰서가 완전히 소실돼 사진 한 장 글 한 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법인기도 시 일산 이재철 대봉도가 생명 희생을 위하여 단도 9자루를 샀다는 옛 시장을 찾았다. 하지만 이곳도 군내 버스주차장으로 변하여 세월의 흐름만 느낄 뿐이었다.

만 1년만에 3만여평의 방언공사를 마치고 방조제 준공 기념비를 만든 그날. 대종사는 9인 단원들에게 “각자의 마음에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고 각자의 몸에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음을 명심하라” 하였다. 9인단원들은 바로 산상기도를 시작하였다 10일간은 마음 청결을 위주하고 계문을 더욱 준수하며 목욕재계하고, 기도 당일에는 오후 8시 안으로 구간도실에 모여 대종사의 교시를 받은 후 9시경에 각자 기도 장소로 출발하여 기도를 한 후 돌아왔다.

기도일은 삼육일(음력 6일, 16일, 26일)로 정하고 계속 기도를 올렸다. 8월 11일(음7.16) 대종사 9인 단원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의 몸이 죽어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없이 실행하겠는가” 9인 단원들은 일제히 “그러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기도일을 최후희생일로 정하고 그날 기도 장소에서 자결하기로 하였다. 9인단원들은 단도를 번뜩하게 갈아 지푸라기로 감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생명희생의 각오를 다졌다.

8월21일(음7.26) 구간도실에 모여 일제히 ‘사무여한’이라는 최후 증서에 백지장을 올리고 결사의 뜻으로 엎드려 심고를 올렸다. 대종사 증서를 살펴보니 백지장이 혈인으로 변하는지라 9인단원들에게 “그대들의 일심에서 나타난 증거라” 하시고 곧 하늘에 불살라 고(燒火告?) 하신 후 “모든 행장을 차려 기도 장소로 가라”하였다.

대종사는 각자 기도봉에 가서 기도한 후 자결하기 위해 묵묵히 떠나는 9인 단원들에게 “속히 돌아오라”한 후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신명이 감응하였고 음부공사가 판결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앞으로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당할지라도 오늘 이 마음 변하지 말라”하시고 일제히 중앙봉에 올라 기도를 마치고 오라 하신 후 법명과 법호를 주셨다.

필자는 구간도실 옛터에 앉아 82년전 법인기도 당시의 모습을 역사에 의지하여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새겨 보았다. 그러면서 법인기도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며, 9인 선진의 정신을 망각하며 살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았다.

새 회상 원불교는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으로 시작되었지만 법인성사로부터 참 종교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법인기도는 9인단원들이 대종사를 모시고 올린 기도라 해야 옳을 것이다. 세속말로 표현하면 소태산 대종사를 대표이사로 하여 9인단원이 진리계에 공동등기를 한 것이라 표현하면 어떨지. 이는 원불교라는 종교 공동체는 협동으로, 더불어하는 후천시대의 질서 윤리의 장을 열음이었다.

법인기도는 각자의 사사로운 마음이 아닌 하늘의 마음으로 기도하여 천지신명이 감응함으로써 원불교 신앙과 모든 의식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선천의 목숨을 버리는 순교에서 살림의 순교로서 순교자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으니 인권시대의 순교자라는 문호를 연 것이다. 또한 법인성사를 나툰 후에도 기도를 계속 함으로써 기도는 거래나 맡겨놓은 물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온통 바치는 것임을 일러주었다.

영산성지는 백수의 구수산과 법성의 대덕산이 와탄천을 사이에 두고 감싸안고 있다. 법인기도 봉우리는 대덕산의 마촌앞산봉과 촛대봉을 비롯하여 구수산의 중앙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법인기도봉 순례는 중앙봉, 공동묘지봉, 마촌앞산봉, 상여바위봉을 오르고 나머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영산원불교대학교 장석준 교무와 김형진 교우와 함께 공동묘지봉을 올랐다. 이 봉우리를 순례했던 많은 교무님들이 “이 곳이 과거에 기도했던 장소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해왔다. 10여년전 올랐던 기도봉은 산 중간지점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형진 교우의 안내로 오른 곳은 산 정상 부근이다. 과거에 공동묘지봉을 올랐던 석준 교무와 필자의 착각인지는 모르나 과거 기억과 현재 위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숲에 가려 천기동 마을이 보이지 않았으나 나무가 베어지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와 착각을 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형진 교우와 다시 상여바위봉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삼복 더위 속에 비오듯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막상 오른 곳은 몇 년 전까지 기도했던 상여봉 능선이 아닌 상여봉 중턱 너럭바위가 아닌가. 이것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형진 교우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이 너럭바위가 상여바위봉으로 알고 영산에서는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해 버렸단 말인가? 산에서 내려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상여바위봉 기도장소가 바뀐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촌앞산봉도 상여바위봉과 같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촌앞산봉은 옥녀봉 방향인 북쪽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이는 필자가 각 기도 장소를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 기도봉에 올라 기념사진도 찍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언제,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도봉마다 흰 페인트를 바위에 바르고 검은색 글씨로 봉우리 이름과 선진님 이름을 적어 표시했었고 자그마한 판자로도 표시를 해 놓았었다. 그러나 이젠 세월이 흘러 어느 곳 하나 표시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우거진 숲만 헤매다 와탄천을 건너 돌아오고 말았다. 그밖에 다른 기도봉도 어떻게 변했는지 알 길이 없다.

영산성지를 관리하고 있는 영산사무소는 인력부족으로 9인기도봉까지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단다.

정산종사께서 기도하셨고 법인 성사를 나툰 후 모든 단원이 함께 올라 기도 올렸던 중앙봉에 올랐다. 세월은 흘렀어도 구수산은 여여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중앙봉에서 각 봉우리의 이름과 9인선진님을 부르며 법인기도 당시의 심경을 헤아려 보려고 지그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현재 영산원불교대학교와 영산에서 이름붙인 기도봉을 일별해보면 일산봉은 설레바위봉, 이산봉은 촛대봉. 눈썹바위봉, 삼산봉은 밤나무골봉, 사산봉은 장다리봉, 오산봉은 마촌앞산봉, 상여바위봉, 육산봉은 옥녀봉, 칠산봉은 공동묘지봉, 팔산봉은 대파리봉, 정산봉은 중앙봉이다.

향산 안이정 종사가 영산선원장에 재직할 때 영산에 기도봉을 정했다고 한다. 향산 종사의 말에 따르면 대종사 당대 제자와 선진들의 고증을 통하여 “건감간진손이곤태”의 팔방으로 기도봉을 지정하였으나 그후 봉우리를 표시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근거로 누가 현재 영산에서 통용되는 표시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원불교사전맨이나 학생들의 논문, 영산성지 안내서, 영산에서 올리는 법인절 전야제 기도에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대종사께서 원기2년 최초의 수위단을 조직하실 제 단원들의 칭호를 건(乾) 감(坎) 간(艮) 진(震) 손(巽) 이() 곤(坤) 태(兌)로 인도상의 이치를 밝힌 문왕 팔괘에 준해 방위를 정했고, 단기도 팔괘기로 정했으며, 법인기도시 팔괘기를 기도 장소 주위에 세우게 하였다. 이와 함께 법인기도에 참여했던 9인 선진 중 일산·칠산 선진의 구술을 들은 선진들의 증언과 당대 제자들의 말씀을 참조해 보면 문왕 팔괘에 방위를 맞추어 처음 기도봉을 정하여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촌앞산봉과 촛대봉은 와탄천의 물때를 맞추기가 어렵고 위험하여 상여바위봉과 눈썹바위봉으로 옮기고, 또 중앙봉을 제외하고는 상황에 따라 기도봉을 여러 차례 바꾸어 가며 기도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서 필자가 추정한 방위와 기도봉은 다음과 같다.

옥녀봉은 건방(서북)으로 일산 이재철
마촌앞산봉은 감방(북)으로 이산 이순순
촛대봉은 간방(동북)으로 삼산 김기천
장다리봉은 진방(동남)으로 사산 오창건
대파리봉은 손방(동남)으로 오산 박세철
공동묘지봉은 이방(남)으로 육산 박동국
밤나무골봉은 곤방(남서)으로 칠산 유건
설레바위봉은 태방(서)으로 팔산 김광선
중앙봉은 정산 송규 종사가 기도하셨던 봉우리다.

9인기도봉에 대한 사진기록으로는 대종사 열반후 묵산 박창기 선진이 촬영기사를 대동하고 찍은 자료가 있다. 그러나 이 사진에는 방위가 또 달리 표시되어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레저레 혼돈하고 있다.

아직까지 교단에서는 합리적이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기도봉 지정을 하지 않고 있다. 원불교 창립정신의 근간이 되는 법인정신이 오늘날 더욱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교단의 공식적인 기구에서 논의되어 기도봉을 지정함이 시급하다.


중앙봉에 서서 옥녀봉을 바라보니 “법인기도는 박제화된 유물이나 일회성으로 끝나버린 의식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원불교의 존재이유와 생명의 원천이다”고 하시는 9인선진님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서문 성 교무, 광주전남교구, 영보선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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