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확립, 교단만대의 초석
원불교학의 새 지평 열어가자

▲ 박광수 교무 /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인간 삶의 모든 현재적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쌓여진 토대없이 구축된 것이 없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있게 한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학문은 미래의 어떤 문화와 문명을 뚜렷한 목표로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가는 식으로 연구되지 않는다. 모든 학문은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것의 토대 위에 현재의 상황과 의식, 욕구를 반영하고 여기에 미래지향적인 신사고를 동력으로 삼아 형성해가는 것이다.

종교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불교학, 유학, 신학 등 각 종교의 학문도 마찬가지다. 교조의 사상이 제자들에 의해 교리화되고, 이를 민중에게 적용하는 방법론을 모색하는 가운데 주변적인 문화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늘의 각 종교 교학이 이루어졌다.

원불교는 개교 이래의 역사가 짧을뿐더러 원불교학 연구의 역사는 타 종교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천하다. 따라서 지금 원불교학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원불교학의 진로와 중심축을 다듬어 정립하는 일은 지금이 적기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학은 당연히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의 사상과 그의 일대 경륜을 집대성한 《정전》을 주축으로 삼아야 하며, 《대종경》 등의 경전과 교단 창립의 역사 속에 담긴 정신을 살려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40여년 동안 불모의 땅에서 일구어온 원불교학 연구는 대체로 그 방향이 크게 어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이 완벽하다고 할 수도 없다. 무언가 결핍된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이 대종사의 경륜에 어긋남이 없는가를 살펴본 후에 원불교학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또 하나의 가지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정체성 확립의 접근 방법이라 하겠다.

대종사는 스승없이 자수자각하였지만 그의 사상은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지탱해온 유, 불, 선으로 지칭되는 동양의 정신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원불교학 연구자들은 유, 불, 선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삼아왔다. 이에 비해 서양철학과 서구 종교사상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 이러한 교학연구의 흐름은 교법에 동양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뿌리깊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한·중·일 세나라에 공통성을 보이는 동도서기 관념은 서구와의 교섭 초기, 서양의 문물만 보고 내린 성급한 판단이었다. 서구의 역사에도 동양에 못지 않은 사상과 철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전근대적 사고의 산물이다. 따라서 원불교는 교학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교법의 세계화 내지 인류 보편윤리를 선도할 사명을 위해서도 서양철학과 서구 종교 사상의 이해에 보다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

다음으로 교학의 정체성 확립에 필요한 요건은 비판기능의 회복이다. 기성종교들에서 보이듯이 일방적인 호교적 논리만의 교학은 종교의 발전에 역기능적이기 쉽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근본교리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리의 해석과 적용 방법론 등 현상들에 대한 비판이 살아나야한다는 말이다. 특히 기성종교에 비해 생활속의 종교, 교법의 생활화를 핵심 주제로 표방하는 원불교이기에 순수한 교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교단의 경영과 구성원들의 의식에 대한 비판이 존중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이는 개교정신을 이어가는 원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며, 교학의 정체성은 이를 담보해내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만 비판기능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학 연구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인식과 공감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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