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왼쪽)와 함께한 중타원 여청운 사모(오른쪽).
도가에 전해 오는 말씀에 「전탈전여(全?全與)」가 있다. 즉 진리계에서 먼저 모두 빼앗아 시험을 해본 연후에 다 준다는 것이다.

정산종사의 생애에서 이러한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종사께서 9인 단원들에게 법인기도를 명하시고 『법계의 인증을 받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이 없어지더라도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 물으니 단원들과 함께 『그러하겠습니다』고 대답하고, 대종사께서 『마지막 남길 말은 없는가?』 하시니 『저희들은 이대로 기쁘게 가지마는 남으신 대종사께서 혹 저희들의 이 일로 인하여 추호라도 괴로우실 일이 없으시기를 빌 뿐입니다』고 사뢰었다. 생명을 바치는 순간에도 오직 대종사를 위하는 일념으로 법계 인증을 받으시었다.

정산종사는 당신뿐만 아니라 조여부모(祖與父母)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다 전탈전여 진리의 시험대에서 긴 세월동안 천신만고를 겪게 된다.

원기3년 7월에 정산종사는 정읍 화해리에서 영산으로 오고, 아버지(구산 송벽조)는 이듬해 3월에 영산으로 와서 대종사를 뵈었다. 대종사께서 아들 있는 곳으로 이사하라는 말씀에 의하여 가산을 헐값에 넘기고 9월에 71세의 할아버지(송훈동), 44세의 아버지, 48세의 어머니(준타원 이운외), 24세의 부인(중타원 여청운), 그리고 13세의 동생(주산 송도성)등 다섯 가족이 성주 고향을 떠나오게 되었다.

김천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에서 내리니 오창건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 무렵 정산종사는 대종사의 명에 따라 변산 월명암에서 수도승으로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변산 근방인 부안군 산내면 지서리로 이사가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영광으로 안내되었다. 그런데 영광에 당도하자 앞뒤가 꽉 막히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영광에 있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집과 전답이며 양식 등을 마련할 비용을 미리 맡겨 놓았는데 그것을 모조리 떼이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큰 시험대의 첫 관문에 들어선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대종사 친제 동국의 집에서 20일을 지내고 군서면 학정리(1983년 영광읍으로 편입) 이재철 댁 별채에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씨 부인은 경상도 있을 때에는 우물 길이나 왔다 갔다 하며 밥해 먹고 옷이나 기우며 살았는데 이제는 땔나무와 양식 걱정을 하게 됨으로 나무도 하러 다니고 밭도 매러 다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경서를, 아버지는 통감 사략을, 아우는 천자문과 글씨를 근동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전 가족이 대종사를 뵈옵고 제자가 되었으며 대종사께서는 유가의 규모를 벗어나서 고향을 떠나 이렇게 영광으로 이사온 것은 숙세의 깊은 인연이라고 격려의 말씀을 하시었다. 아버지와 아우 도성은 길용리까지 3, 6일 예회를 꼭 보러 다녔고, 아우는 원기7년 16세 때에 사가를 떠나 석두암에 계신 대종사 시봉을 하게 되었다.

군서면 학정리에서 5년 동안 살다가 원기9년 3월에 영산으로 이사하였다. 방, 부엌, 곳간 각 한 간의 3칸 집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방을 사용하고 어머니와 부인은 양하운 대사모(대종사 부인) 방에서 함께 거처하였다. 청운사모는 낮이면 저물도록 밭 매고 밤이면 방아를 찧었다. 영산 임원들 바느질도 해주고 방아도 찧어 주었다. 그래도 좋은 줄만 알고 고된 줄은 몰랐다. 밤에는 취지서도 읽고 일기도 쓰고 시어머니와 때로 붓글씨도 썼다.

고향을 떠나온 지 6년만에 76세로 할아버지가 열반에 들고 이해 원기9년에 총부가 건설됨에 따라 영산원은 영광지부라 이름하여 초대 교무에 아버지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본댁에는 어머니와 부인 고부간에 살게 된다. 3년 지나 양하운 대사모가 임실로 이사함으로 이 방에서 고부만 살게 되었는데 다시 3년 지나 이원화가 이 방으로 들어오게 되어 식당 방으로 나앉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원기15)에 「이재철 집이 영산으로 이사하려는데 집이 팔리지 않으니 그 집으로 가서 집 팔아 주고 오라」는 대종사의 말씀이 내리셨다는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여청운 사모로부터 들어보면 『어머니(이운외)께서는 「종사님이 하라 하신다니 옥녀봉에 가서 살라 하면 옥녀봉에라도 가서 살아야지」 이렇게 하고 영봉, 네살 먹은 것 데리고 세 식구가 집 팔아 주려 나갔다. 사는 것이 농짝 같이 이리 갖다 놓으면 이리 가서 살고 저리 갖다 놓으면 저리 가서 살고 모을 생각 없고 그날그날 사는 것밖에 모른다. 3월에 가서 겨울에 집 팔아 주고 이듬해(원기16) 정월에 돌아 왔다』

어머니와 청운사모는 원기9년에 영산으로 와서 23년 정도 살고 청운사모는 영산지부 감원 일을 맡아 서원서만 내지 않은 착실할 전무출신으로서 3년간 영산지부 내의 큰살림을 해 나왔다.

이 무렵 어머니는 78세의 노인이 되고 부인은 54세의 노년기에 들었다. 총부 원로 몇 분이 상의하여 원기34년에 어머니만 총부 금강원 윗방에서 거처 하도록 주선하였다.

이해 가을이 되면서 영산 근방에는 야간에 반란군이 자주 나타남으로 밤에 총소리 요란하게 경찰과 접전이 많았고 밤과 낮으로 좌우가 바뀌는 세상 변동이 잦은 판국이었다.

그러므로 영산 부근 주민들은 이삿짐을 챙겨 외처로 나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청운사모도 이러한 틈에 그 때까지의 총 재산인 재봉틀 하나를 들고 남의 이삿짐 차에 올라타고 총부 부근으로 왔다. 이 사정을 아는 이영훈(대산종사 부인)이 짐이 들어 있는 자기 집 뒷방 하나를 치우고 청운사모를 맞이하였다. 청운사모는 이영훈을 비롯한 몇몇 동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하루는 점심 식사한 것이 단단히 체해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가느다란 긴 칡뿌리를 목구멍으로 살살 돌려 한참 집어넣더니 쭉 잡아 빼는 칡침 치료를 받아 보았으나 체증이 내려가기는 커녕 차츰 가슴에 통증이 일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흉부 어느 기관에 상처가 난 것이 분명했다. 열이 더욱 심하고 의식을 잃을 정도에 이르기 여러 날이 되었다.

『아무 가늠 없이 그럴 수가 있을까?』 곁에서 침 놓고 간 사람을 탓하면 『아니 병이 나려니 그랬지, 다른 걱정은 없는데…. 살아서도 영훈이한테 폐 끼치는데 죽은 뒤에도 영훈이 방으로 내 널이 지내갈 것이 걱정이네』

방의 위치가 뒷문을 열면 바로 언덕이라 관이 나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큰방을 거쳐야 될 형편이기에 하는 걱정이었다.

그런데 천행으로 위경을 넘기고 여러 달 후에 건강이 차츰 회복되었다. 청운사모가 이 집에서 1년을 사는 사이 총부에서 원기35년에 정신원 뒷편 조그만 방 하나를 마련해 줌으로 그 방에서 다시 고부간에 만나 어려운 살림을 하게 되었다. 이 방에서 8년을 지낸 뒤에 원기43년에 교무들이 뵈옵기 황송하여 집 한 채를 마련하여 드렸는데 어머니와 청운사모가 열반하신 후 교중으로 되돌리었다.

정산종사 일가는 당신을 비롯하여 아버지, 아우, 두 딸이 전무출신으로서 심신을 교단과 시방세계 일체생령을 위하여 다 바치고 어머니와 부인도 정토회원으로서 평생 법열 속에서 심신을 다 바치었다. 그리고 한가지의 사적 소유도 남긴 바가 없다.

2억 민중의 신망을 한 몸에 모아서 인도를 독립으로 이끈 간디의 유산이 슬리퍼, 샌들, 찻종지, 숟가락, 애용의 가집, 회중시계, 안경 등이었다 하거니와 정산종사는 이 보다 더하여 정신 육신 물질 가족은 물론이요 일가 친척 중에서도 많은 사람을 바치시었다. 이와 같이 진리계에서 다 빼앗은 것이다. 이러고 나서 진리계에서 준 것이 무엇인가? 시방삼계가 다 오가의 소유 즉 우주 만유를 남김없이 다 준 것이다.

〈교무, 전북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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