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화해리에서 7개월 ②-

▲ 만국양반(정산종사)이 기도를 올렸던 화해리 뒷산 매봉.
▲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을 기념하는 화해제우지비.
도깨비 공양

문명의 이기가 보편화되기 전만 해도 시골에는 도깨비 일화가 많았다.

1918년, 전라도 화해리에도 도깨비 출몰 화제로 주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구남수와 김해월, 동네의 또 다른 아낙 그렇게 셋이만 있을 때 도깨비 문제를 가지고 그 궁금증을 소년 도인에게 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도군은 느닷없는 말을 하였다.

『도깨비들이 뭘 먹고 싶은가 보네』

아낙들이 「무엇을 장만하면 쓰겠냐」 물으니 도군이 일러주었다.

『메밀묵 한 동이 해 가지고 매봉 올라가는 솔도 없고 한데 거기 무덤 앞에 들여놔 보이소』

흉년에 허기 져서 죽은 귀신들이니 그들(도깨비)에게 음식상을 하나 잘 차려주라는 것이었다.

집에서 100m쯤 매봉 올라가는 중간참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잘 꾸민 무덤이 하나 있었다. 소년 도인이 시키는 대로 메밀묵과 다른 음식 등 한 상을 차려놓았더니 과연 어둠이 깊어지자 도깨비불이 사방에서 번쩍거리며 매봉으로 모여들며 빽빽 소리가 났다.

부인들은 무서워서 도군이 있는 웃방으로 넘어왔다. 소년 도인이 「쉬」 하니 소란스러웠던 도깨비 장난들이 일순간 그쳤다. 도일의 집 앞의 버드나무 있는 데 와서 불이 싹 꺼져버린 것이다.

필시 소년 도인의 위력에 겁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한 동안 조용하더니 무덤에서 쪽쪽쪽 무엇을 열심히 먹는 소리가 났다. 도일이 건너 방에서 들으니 웃방에서 「아, 아!」 소리가 났다. 쪽쪽쪽 그 소리가 도깨비들이 허겁지겁 먹는 소린 줄을 그제서야 아낙들이 알아챈 것이다.

한참 뒤였다. 다시 버드나무가 서 있는 참에서 도깨비불이 번뜩거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김도일 구술자료).

부질없는 일

구전으로 전하는 정산종사의 화해리 이적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해동댁이 마당에 곡식을 말리기 위해 널고 있자 만국양반이 말하였다.

『어머이요, 비가 올라카니 마 거둬들어이소』

그 말대로 하였더니 한참 뒤 과연 날이 흐려지면서 소나기가 좍좍 내렸다 한다.

°하루는 집안 식구들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 참이라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하느라 급히 서둘고 있는데, 이 딱한 정상을 보고 만국양반이 물었다.

『어머이요, 이 일을 해지기 전에 끝내야 됩니꺼』

『그러지라오』 하고 대답하였더니 일 마칠 때까지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구전).

°한번은 도군이 정읍장에 가는 도일에게 오색 물감을 구해 오게 했다.

그것으로 부적 같이 생긴 붉은 그림을 그려놓고 동쪽으로 난 문을 열어놓고 벽에 투과시키니 하늘의 구름이 실상과 다르게 요지경처럼 보였다고 한다(김인용).

°도군이 신통도 부리고 사물에 달관하는 능력도 있으므로 증산교 도꾼들 사이에는 「경상도에서 온 송 아무개가 개안하였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도군은 조금도 그러한 평가에 만족하지 않았다.

뒷날 정산종사는 이러한 이적에 대해 말하였다.

『내가 그때는 도를 몰랐기 때문에 부질없는 일이 나타났으며, 혹 때로 나도 모르는 가운데 이상한 자취가 있었을 따름이니라』(정산종사법어 기연편4).

조선에 없는 만국양반

°화해리에서 7개월 있는 동안에도 정산종사는 여러 곳에 편력하였다. 가끔 도일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다. 한번은 도일에게 대항리 너머 동네에 임박사라는 사람한테 편지를 써 주면서 『갖고 가면 뭐 줄 것 있은게』 부탁하여 갔더니 무슨 책을 주는데 돌아오면서 펼쳐보니 〈천문도〉였다.

°한밤중에 누군가 도군의 방에 좍좍 모래를 뿌려댔다. 누가 해꼬지할까 걱정이 되어 한들댁이 놀라 도군의 방으로 건너왔다.

『어머이요, 걱정 마이소. 갈가지(호랑이 새끼)가 나한테 인사하는 거 아잉교』

그러더니 잠잠하였다. 다음날 바깥에 나가보니 과연 새끼 호랑이의 발자국이 뒷마당에 찍혀 있었다(김해운→김정용).

방 하나를 대나무가지로 간을 막고 살아도 일곱 달을 함께 지내니 허물도 없어지고 정이 무척 들었다. 집안식구들이 서로 그 양반 없으면 못 살 줄 알고 살았다.

소년 도인은 저녁마다 기도를 다녔다. 마을 뒤에 자그만 구릉이 있는데 매봉이라 불렀다. 매봉에 기도 갈 때면 소년 도인은 막내를 불렀다. 깨벗고 다니는 아이를 「네째야!」 하고 부르면 「녜」 하고 쫄랑쫄랑 따라나섰다. 매일 일과적으로 저녁마다 안 빠지고 다녔다. 이러한 기연으로 그 네째 기순(基順)은 뒷날 슬하의 둘째, 세째딸 의성과 삼진(현재 남울산교당 교무)을 전무출신시킨다.

김해운의 택호는 한들댁이다. 본동(화해리) 한다리에서 시집왔다. 여름철이었다. 마루에 와서 식구들이 같이 저녁을 먹다가 한들댁이 물었다.

『선생님 택호가 어디시다요』

『광대안댁임더』

「광대안 양반이라…」 한들댁이 몇번 되뇌어보더니 아무래도 귀에 선 지명이라 머리를 흔들었다.

『거 못쓰겠네. 조선에 없는 만국 양반인게 만국양반이라 해야 쓰겠구먼』

그렇게 해서 소년 도인은 「만국양반」이란 별호가 붙었다. 소년 도인은 그냥 웃기만 하였다. 만국양반이란 세상에서 가장 잘난 양반이란 뜻이다. 소년 도인을 처음 볼 때부터 한들댁이 찬탄하는 감탄사가 있다.

「동산에 떠오르는 달이 아니간디」

그녀가 볼 때 광대안 양반이야말로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

대종사 ?機를 관하고

단장(대종사)은 때가 있는 줄 짐작하면서도 먼저 만난 단원들에게 중앙위의 막중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단원들에게 노자돈을 마련해 주며 찾아보게도 하였고, 간혹 밤하늘에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 일이 이뤄지지 못한다』

그렇게 석달이 지나갔다. 원기2년 음력 시월경이었다. 대종사와 정산은 갈재(蘆嶺)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호남선 두 역두에서 서로 만나기를 천안으로 관하나 일진이 사나와 뜻같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 하루 전날 단장은 이재풍(일산)과 오재겸(사산) 두 단원을 불렀다.

『그대들이 장성역에 가서, 체격이 작은 편이고 낯이 깨끗한 어떤 소년이 차에 내려서 갈 곳을 결정하지 못하고 서성거리거든 데리고 오소』

두 사람이 명을 받들고 다음 날 출발할 행장을 차렸다. 이날 저녁 식후에 단장이 다시 그들에게 일렀다.

『장성 갈 일은 그만 두소. 후일 자리잡아 앉은 뒤에 다시 데려 오리다』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정읍 화해리에서 소년 도인은 이른 아침에 나들이 채비를 서둘렀다.

『역에서 중한 손님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안 갈랑교』

도일 더러 동행하자며 함께 길을 나섰다. 십리길을 걸음을 재촉하여 막 역에 도착하니 대합실에서는 대판 싸움질이 났다. 듣기에도 차마 끔찍한 욕질을 해대고 그 자리에 서있기가 민망하였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다가 소년도인이 말하였다.

『안 올 날 온 것 같심더. 고마 돌아가입시더』

갈재 터널 마주보고 정읍-장성 두 역두에서 기다리던 소망이 일진이 사나워 이로써 허사가 되고 말았다. 한 수 앞선 대종사는 이 일을 미리 관하고 처음 계획했던 장성역에 아예 사람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열달 뒤였다. 원기3년, 길룡리 앞 갯벌막이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의 초여름이었다. 하루는 대종사가 제자들을 데리고 『우리가 찾던 사람이 어디 왔는고 한번 보세』 하며 옥녀봉 중턱에 올라가 한동안 천기를 살폈다.

『그 사람이 멀리 있지 않네』

대종사가 김성섭(팔산)에게 말하였다.

『나와 함께 저 웃녘에 가세』

두 사람은 보행으로 무장 고창을 거쳐 정읍 화해리로 갔다. 120리나 되는 먼길이었다.

화해리 동네 앞에 논 몇 마지기 있는데 한들댁 뒷집 노인이 피를 뽑다가 허리를 펴고 둑 위에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그때 어떤 점잖은 사람 둘이 틈을 넘어와서 거기 냇가에서 쉬었다. 대종사가 마동 새터 마을을 바라보더니 김성섭(팔산)에게 시켰다.

『저기 집에 가서 얼굴이 해사하고 자그만 소년을 만나거던 데리고 오소』

그러다가 대종사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그만 두소. 같이 갑시다』 하고 앞장서서 아는 집 찾아가듯 성큼성큼 누구에게도 물어보는 법도 없이 바로 한들댁 집으로 들어갔다. 이때 송도군은 방에서 나와 동산쪽을 향해 이마 위에 손을 얹어 한참 쳐다보더니, 문밖으로 나가서 선풍 도골의 신선같은 어른을 맞아 들여왔다. 그토록 찾으시던 그 스승 그 제자가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노인은 참 별일도 다 있다 싶었다. 수십년 이웃에 살아 한들댁에 출입하는 일가붙이들은 다 알고 지내는데 타관 객지 사람이 기부네 집에 서슴없이 출입하는 것을 보고 노인은 의아스럽게 여겼다.

노인은 한들댁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음력 6, 7월이면 시골에 아무리 넉넉한 사람들도 그때까지 식량 먹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장정 손이 둘이나 들어닥쳤으니 점잖은 손님 아침저녁 공궤가 걱정일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 도일이 집에 들어오니 생전 못 보던 손님 둘이 와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그날 저녁 방을 내주고 도일은 이웃에 가 잤다.

아침에 궁금증을 못 이긴 한들댁이 만국양반에게 물었다.

『밤새도록 잠 안 자고 무슨 이야기를 그리 했다요?』

『긴한 문중사라 이바구가 좀 길었심더』

만국양반은 대종사를 문중 양반이라 둘러대었다. 같이 사는 식구들도 손님이 무엇을 하는 어떤 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였다. 그냥 만국양반의 친가에서 누가 왔다 가는 줄 알았다 하며, 대종사께서 이 마을을 향해 걸어올 때에 온 동리 사람들이 저 집에 무슨 손님이 저토록 훌륭할까 여러 날 화제가 되었다.

대종사는 송도군의 마음을 돌려 영광에 데려가려고 2일간을 화해리 이웃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한들댁의 지극한 만류로 일시에 정의를 뗄 수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한달 뒤에 다시 중로에서 만나기로 약속고 헤어졌는데, 대종사는 신의의 표시로 도군에게 담뱃대를 주었다.

「담뱃대」란 말에 대경실색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담뱃대란 서로 교감한다는 뜻이요 ?誼(정의)를 나눈다는 뜻으로 信義·結束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계명에 사로잡혀 본다면 진정한 도의 和一됨이 무색해지고 道伴(도반) 간의 신의가 경색되고 만다. 도는 계명이 아닌 것이다.

(이상의 글은 김도일의 구술자료, 그의 아드님 김인용-정용 형제의 이야기, 『원광』54호의 이경순의 글에 근거하였습니다‥필자)

〈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