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龍 德

▲ 정산종사 진영
대종사, 월명암 하안거
결제 직후 첫 방문

대종사의 월명암 방문은 기미년 봄과 초겨울 일경에 두 차례나 피체되어 풀려난 직후의 일이다. 길룡리 간석지 방조제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에 전국이 만세 운동으로 들끓자 대종사는 경찰에 연행되는 수난을 당하면서 어느 기간 동안 고향을 떠나 있을 생각을 하였다. 장차 새 회상의 창립을 위해서 교강 제정, 인연의 결속 등 여러 가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영광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대종사는 구수산에서 산 첩첩 물 첩첩 2백여리나 상거한 부안 변산 월명암 중천에 어리는 맑은 기운을 관하였다. 아마도 이때가 음력 사월열엿새 하안거 결제 이후가 될 것이다. 대종사 직접 그곳에 가보았더니 부안 변산 월명암, 과연 그곳에 수도 대중이 모여들어 선을 시작하고 있었다(대종경 천도품 25).

월명암(月明庵)은 변산에서 세번째로 높은 쌍선봉(498m) 근처에 자리잡은 절이다. 행정구역상으로 부안군 산내면(현 변산면) 중계리에 속하는 산상에 있는 절로서 통일신라 신문왕 11년(서기 691) 부설거사(?雪居士)가 창건한 절이며 일가족이 득도한 유서 깊은 선찰이다. 월명암은 신라 때 의상대사가, 조선조에는 진묵대사가 17년간 주석하였고, 최근에는 학명·용성·고암·서옹·해안 등 고승대덕이 머물렀다. 월명암은 부설거사가 초창하고, 조선조 선조 26년(1592)에 진묵대사가 중창, 철종 14년(1863)에 성암화상이, 1915년에는 학명선사가 네 번째로 중창하였다.

월명암에서 3일 안정하자
지혜 밝아져

첫 번째 월명암 방문에서 대종사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내가 부안 변산 월명암에 간즉 「不與萬法爲侶者是甚?(불여만법위려자시심마)」란 문구가 붙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객실에 들어가 앉았어도 그 문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마침 차를 가져다 주기에 받아 마시다가 홀연히 알아버렸다. 그 다음은 「萬法歸一 一歸何處(만법귀일 일귀하처)」란 문구를 보았는데 역시 즉석에 알아버렸다』(이공주 수필법설 〈성도기념일〉 1941. 12. 8)

이때 대종사는 심중에 이렇게 생각을 굳혔다.

『내가 병진년 후에 보임할 시간을 못 가졌고, 방언공사 하느라고 심신을 과로하게 썼더니 지혜가 약간 어두워졌나 보다. 조용히 수양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 월명암에서 3일간 안정을 하자 다시 지혜가 밝아졌다. 이에 대해 대산종사 언급한 바 있다. 「성인도 중생과 다름이 없으나 다만 어두워지면 밝게 하는 능력이 계시고 복이 없으면 복을 있게 한다. 옛날 부처님께서도 7일 입정에 7일 설법이라 하셨다. 또 6개월간 공부하고 또 나와서 일하고 했었다. 우리가 수양을 하지 않으면 전지가 닳아버린 녹음기와 같이 쓸모가 없다. 정신에 저축고(貯蓄庫)가 없으면 일생과 영생이 허망하고 만다」(『대산종사 법문과 일화』 1973. 8. 7)

대종사, 회중시계 9개 가지고
변산 입산

법인성사가 끝난 그 해 여름, 대종사는 중앙단원 송규를 먼저 월명암으로 보냈다. 미래 회상의 설립 근거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대종사의 두 번째 월명암행은 그로부터 석달 뒤이다. 대종사,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 갔다가 「생불 출현 사건」으로 김제경찰서에 피체된 뒤의 일이었다. 음력 시월초엿새날 앞당겨 산상기도 해제를 하고 대종사는 단원들에게 방조제 관리 및 간척답 일을 당부하고 도보로 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날이 음력 시월스무날(12. 11)이었다.

대도를 성취하고 바다를 막아 상당한 농토를 마련하였지만 첫해 농사는 염독으로 인해 실농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일의 순서를 헤아리기에 앞서 터무니없이 그 기대가 큰 만큼 막상 가을걷이를 당해 그 허퉁함은 컸다. 30년 동안 정들어 살았던 고향을 떠나는 대종사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초초한 행장으로 나선 대종사에게 제자들은 여비에 보태 쓰라며 기도시에 쓰던 회중시계 아홉개를 거두어 주었다. 그 곤궁한 정경을 『창건사』에는 「단원 및 영광 일반 신자는 모두 섭섭한 눈물로써 대종사를 배별(拜別)하였다」라 서술하였다.

대종사의 변산 입산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기미년 만세사건으로 비롯된 일경의 감시와 지목을 피하여 교화와 사업을 펴고자 함이다. ② 방언공사를 하고 5~6년간의 염독(鹽毒)으로 인한 간척답의 실농(?農)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의 풍작을 기대하고 신통을 바라는 급속하고 들뜬 인심을 가라앉히기 위한 피신이다. ③ 장차 회상을 창립하고자 함에 있어, 먼저 무상대도인 불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불가에 머물며 그 교리와 제도를 참고하여 혁신 교리와 제도를 구상하고 초안하고자 함이다. ④ 새로운 인연을 만나 장차 정식으로 회상을 열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⑤ 각후 영산에서 분망한 사업으로 인한 복잡한 정신을 쉬고자 함이다.

사산, 두차례 대종사 변산수행

영광에서 기도 해제를 하고 음력 시월스무날 대종사 변산에 갈 때 수행한 제자에 대해 2가지 설이 있다. 정산의 『창건사』와 응산의 『봉래산 실상사 탐방기』에는 오창건이라 하였고, 주산의 〈대종사 약전〉과 구타원의 『1대 유공인 역사』에는 박세철이라 기록하였다.

대종사는 오창건을 대하기가 가장 이물 없고 무간하여 영산에서 변산 수행시에 수시로 동반하였다. 「봉래정사 시봉 실경」 기념사진에도 지게를 진 오창건의 모습을 볼 수 있거니와 사산은 지게 짊어지고 대종사를 모신 일화가 여러 건 전해진다. 장기간 있기도 하고 산중으로 들어가는데 수행하는 사람이 보따리 하나만 달랑 매고 따라가진 않았을 것이다. 먹고 입는 물품 조달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 상당한 무게의 짐을 짊어졌을 것이다. 박세철은 무거운 짐을 이틀 내 짊어질 정도로 건강하지 못했고, 그가 대종사를 배종할 때는 설한풍 휘몰아치는 엄동이었다. 길은 험악하고 살과 뼈를 파고드는 추위에 온몸의 촉각이 굳어버릴 정도의 추위속에도 박세철은 오직 이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하늘 같으신 우리 스승님을 이 제자가 못나 제대로 편안히 모시지 못함을 죄스럽고 송구하게 여겼다고 한다.

『창건사』의 기록에 의거, 변산 행가 일자가 음력 시월스무날이라면 양력으로 12월11일이라, 초겨울이기 때문에 설한풍 휘몰아칠 정도의 혹한의 시기가 아닌가. 아마도 박세철의 변산 수행설은 대종사 여러 차례 영산 -변산 내왕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대종사 변산 입산은 세속을 청산하고 저 혼자 잘되고자 하는 일(獸善其身)이 아니었다. 아주 입산수양한 것이 아니라, 일이 있을 때마다 대종사 수시로 변산과 영광을 내왕하였다. 처음 두차례는 사산이 동행하였고 그 다음은 오산, 그리고 일산과 팔산이 배종한 일도 있었다. 흔히 입담 좋게 떠벌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제 개인 체험만 중시하여 전달 과정상에서 「최고」니 「최초」라는 등, 「굉장한 것」 등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는 사례가 많은 법이다.

오창건의 변산 수행 주장은 쌍선봉 기도에 대종사와 정산과 같이 셋이 해제식을 하였다는 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再백일기도 쌍선봉에서 해제식

대종사 일행이 이틀만에 2백리 길 서해 연안을 육로로 걸어 월명암에 도착하니 음력 시월스무하룻날이었다. 월명암에는 동안거 결제를 시작한지 닷새나 지났다. 여기에 한가지 짚히는 것은, 대종사는 산중의 기운을 보고 온 것인지 두 차례 모두 동하 안거의 결제식 뒤에 찾아왔다는 점이다.

근 석달 보름만에 사부주를 만난 명안(明眼, 송규)은 환희 용약하였고 그들은 절에서 외삼촌과 조카 사이로 행세하였다. 학명 주지 또한 대종사를 대단히 반가이 영접하여 그 친절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월명암에 온지 닷새 뒤인 시월스무엿새날, 대종사·송규·오창건 세 사람은 은밀히 절 근방 쌍선봉에 올라갔다. 영광에서 음력 시월초엿새날 단원 기도 해제식할 때 중앙 단원 송규가 참예치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특별히 배려하여 의식을 행한 것이다. 1차 산상기도 뒤(음 7.16) 백일째되는 날 단원 기도 해제식을 하였다.

도성이하고 우리 맏네하고
한번 바뀌서 가르쳐봅시다

기미년 음력 시월, 가산 판 돈을 어이없이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 당하고 나머지 세간을 정리하여 송씨일가가 정착한 곳은 영광 남부 군서면 학정리 신촌 마을이었다. 다섯간 초가집에 헛간채 하나 딸린 집에서 그야말로 적수공권의 고달픈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안식구들은 경상도 고향에 있을 제야 우물 길이나 다니며 세때 밥해 먹고 옷이나 기우며 살았는데, 이제는 끼니때가 되면 땔나무 걱정 먹을거리 걱정을 하여야 했다. 결혼 7년이 되도록 배태도 못한 새댁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일산의 부인 따라 나무도 하러다니고 밭도 매러 다녔다.

남부 신촌에서 한 5년 살면서 송성흠·벽조 부자는 집안 살림을 별로 거들지않고 고향에서 하던 일 그대로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무렵 학정리와 신천리에 사는 함평 이씨의 자제들치고 송씨 3대에게 훈도를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조부 성흠은 경서를, 그의 아들 벽조는 『통감』과 『사략』을, 손자 도성은 근동의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쳤다. 불덕산 함평 이씨 일문은 이때부터 송씨 일가와 불연이 도타워졌다.

집안 일은 자연히 며느리 혼자 나가 살림을 꾸릴 수 밖에 없었다. 형수 혼자 고생하는 것이 딱했는지 도성이도 산에 가서 나뭇짐을 비틀거리며 지고 내려왔다. 생전 해보지 못한 지게질이라 서툴렀다.

얼마 뒤에는 어머니도 나서서 밭도 매고 나무하러 다녔다. 처음에는 소풍 삼아 밭을 매러 다니기도 하다 뜨거우면 들어가고 했지만 나중에는 품앗이로 노상 다니다시피 하였다. 고부간에 같이 나무하러 갈때는 갈퀴가 하나 뿐이라 며느리는 갈퀴질을 하고 시어머니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주웠다. 고부간은 매일 뒤곁에 나무 한 비늘씩 쌓는 재미로 일했다.

『경상도 있을 제야 맨 가는 데는 샘 길 밖에 안 다녔는데 성사님 덕분에 나무를 다 하네. 경상도 있으면 이런 경험 했을까』

나뭇짐을 이고 다니는 고부간은 이 일이 고생스럽지가 않고 그냥 좋기만 하였다. 그것은 바깥양반들이 하는 일에 대해 조건 없는 신뢰에 근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고부간은 고중의 낙을 발견하는 지혜가 있었다.

대종사는 송씨 일가의 곤핍한 생활에 대해 매우 부담을 느꼈다. 하루는 대종사가 도성에게 은근히 물었다.

『네 어머니 뭘 하고 계시냐?』
『날마다 앉았심더』
『네 아줌니는 뭐 하냐?』
『날마다 나무 합니더』

남부 신촌에서 반년쯤 살았을 때였다. 대종사는 민망한 얼굴로 송벽조를 보며 말하였다.
『도성이하고 우리 맏네하고 한번 바꿔서 가르쳐 봅시다』

대종사는 큰 딸을 보내 그들의 노고를 덜고자 하는 배려였다. 대종사의 장녀 맏네가 신촌에 와 살게 되자 도성은 길룡리에 가 살게 되었다. 이것이 두 가문의 혼약인 줄을 도성과 맏네는 알지 못하였다.

영광 남부 학정리 신촌 송씨네 집에 와서 맏네는 유가의 예법을 익히는 한편 식구들과 같이 나무를 하러 다니고 집안 일도 거들었으며, 또 송벽조에게 한문을 배웠다. 나이가 두살 위인 도성이 가끔 집에 오면 맏네에게 언문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고 붓 글씨 체줄도 잡아 주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사이는 송도성이 경성 교무로 있을 때도 계속 되었다. 남부에서 2년 동안 길선은 상당히 글도 익혀 백문까지 보게 되어 퍽 재미를 붙였다.

『이제 일년만 하면 문리를 얻겠다』는 칭찬도 들었는데 길룡리 아버지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라는 기별이 왔다. 맏네는 서운하고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맏네가 길룡리로 돌아왔을 때 이미 송도성은 부안 변산으로 전무출신하러 가고 없었다. 2년 동안 대종사는 양가의 식구를 교환하여 셈을 분명히 하였다. 딸 맏네로 하여금 유가의 규범이 있는 집안에 두어 규중의 예법을 익히는 한편 글을 깨치게 하였고, 도성은 당신의 문하에 두어 장차 회상 창립의 큰 기둥 만들 계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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