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 속 인물 /용산 서대준 원로교무

 

용산 서대준 원로교무는 대학진학시 정산종사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은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이나 혹은 원광대 보다 좀 더 알려진 명문대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서 원로교무.

정산종사는 그같은 사실을 어찌 아셨는지 조실로 부르시고, 한 시간이상 꾸지람을 하셨다. “네가 대학을 서울로 가려 한다지? 대통령이 부러우냐? 부자가 되고 싶냐? 명예를 얻고싶냐? 다 부질없는 것이다. 너는 도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영원히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들 때문에 대학을 만들었는데 너희들이 우리대학에 안가면 누가 가겠느냐? 정히 원불교학과가 어려우면 다른 학과라도 우리대학에서 공부해라”고 하셨다.

서 원로교무는 깊이 생각한 끝에 원광대 교학과에 가기고 결정했고, 결과적으로는 정산종사의 말씀을 받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법성에서 떨어진 용덕리가 서 원로교무의 고향, 정산종사를 처음 뵌 것은 6세때 였고, 그후원기34년 14세때 총부로 왔다. 처음에 총부생활이 익숙치 않았지만 조석심고만은 빠짐없이 올렸다는 서 원로교무.

“조실에 계신 정산종사는 사랑방 할아버지 같았어요. 누구나 쉽게 뵐 수 있었고, 늘 상의를 드리곤 했습니다. 총부 인근에서 생활했던 정토들도 사가 살림의 어려움까지 상세하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가족같은 훈훈한 분위기 였습니다”고 이야기 한다.

서 원로교무는 정산종사께 크게 칭찬을 받은적이 있다. 그것은 최초로 원불교 학생회를 조직했을 때 였다. 중학교 2학년때 중앙총부에서 생활하고 있던 또래들을 중심으로 학생회를조직, 서 원로교무가 첫 회장을 맡았다.

“정산종사님은 내가 ‘총부 학생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학생회원들을 조실로 부리시고는 ‘그래, 그래야지, 너희들이 그래야지, 장하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두 번이나 “조석심고 열심히 하라”고 각별히 챙겨주신 스승의 정의를 생각할때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고 회고 했다.

한번은 6·1대재 표어를 공모했는데, 당시 서 원로교무가 공모한 내용이 1등을 받아 상금을 탄적이 있었다. 표어 내용은 최근에도 자주 쓰이는 것으로 ‘이어받는 창립정신 끊임없는 추모정성’이다. 당시 상금을 받았으니 한턱 내라는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 조금 다친일이 있었다.꿰맨 것을 보신 정산종사는 “무슨 일을 하고 나서 흔적이 없어야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 말씀은 서 원로교무가 지금도 마음에 두고 늘 삶의 표준으로 삼는 교훈의 법문이다.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또 한가지 법문은 언젠가 대각전에서 설법하신 것으로 ‘마음을 비워라’라는 말씀입니다. 일생을 그 말씀을 받들어 마음을 비우고, 재색명리에 초연하고자 노력했다.”

원기46년 총무부에 근무할 때 조실에 가서 연하장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으로 정산종사를 뵈었을 때 정산종사는 서 원로교무에게 ‘복하신년, 도운융창 복혜증진’이라고 적어주셨다. 매년 새해가 되면 서 원로교무에게 늘 새롭게 다가오는 법문이다. 원기48년 원광중·고등학교 교사로 처음 발령을 받은 뒤 원광중학교 서무과장, 원광중학교 교장, 원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 일생을 교육계에 헌신해온 서 원로교무.

교립학교 최초로 법당을 마련하고, 종교반 활동을 추진, 교학시간을 만들어 전무출신등 수많은 교단의 인재를 배출해내는데 공헌했다. 원기84년 퇴임때는 원광고에 1천만원의 장학금을 기탁해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요즘엔 하루하루 한가롭고 여여한 심경으로 수도정진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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