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광 수

▲ 혜타원 윤치덕 대호법의 백수연에 함께 한 가족들. 횐쪽 첫번째가 필자.
이 글은 지난달 23일 열반, 원불교 교단장으로 모신 혜타원 윤치덕(慧陀圓 尹致德, 호적명 정식) 대호법의 백수연(百壽筵)을 맞아 막내아들인 한광수 씨가 지난 10월19일 쓴 것이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윤치덕 대호법의 열반을 애도하며, 지난달 28일 조전(弔電)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사람이 두 세기 걸려 사는 일도 아무에게나 있는 일은 아니다. 하물며 3세기 걸쳐 사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인데, 엊그제 만 100세를 맞아 백수연(百壽筵)을 치루신 나의 모친은 19세기말부터 21세기초까지 3세기에 걸쳐 사셨다. 100살을 산다는 일이 워낙 드문 일이라, 만으로 99세가 되면 우리나이로는 100살로 치니까 백수(白壽)라고 해서 생신잔치를 해드린다. 만으로 100세가 되면 흰 백(白)자에 한 획을 더 보태어 일백 백(百)자 백수(百壽)라고 해서 생신잔치도 백수연(百壽筵)이라 했으며, 옛날엔 온 고을이 나서서 잔치를 했다고 한다.

모친의 백수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기에 모친께서 평생에 걸쳐 심신을 의탁하시는 원불교 관계 손님들과, 아버지께서 60여년전 고향인 개성(開城)에서 설립하셨으며 [개성유린관(開城有隣館)], 지금은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회복지법인 유린보은동산의 임직원들만을 모신 조촐한 잔치를 준비했었다. 아무리 외부에 초청장은 내지 않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모친을 잘 아는 죽마고우들에게는 연락을 했고,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의사인 탓에 알음알음으로 알게되신 의료계 여러분께서 축하해 주신 덕분에, 애초에는 80명을 예약했었는데 200명도 넘는 하객이 참여해주신 제법 큰 잔치가 되어버렸다.

백수연(百壽筵)이 드문 일이다 보니 연회를 맡은 식당에서는 한글로 ‘100회 생신 축하연’으로 현수막을 걸었고,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많은 화환과 화분엔 흰 백(白)자 백수(白壽)와 일백 백(百)자 백수(百壽)가 다 쓰여 있었다.

옛날부터 100살이 된 백성에게는 임금님이 ‘명아주’ 지팡이를 내린다고 했는데, 생신에 맞춰 동장이 대신 전한 지팡이는 아주 가볍고 단단한 ‘명아주’ 지팡이였으며, 겉포장에는 ‘대통령 김대중(?統領 金?中)’의 금빛글씨가 선명했다. 서울시장은 은수저 한 벌을 보냈다.

팔자에 없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제삿날에도 참석을 못했는데, 어머니 백수(百壽)에도 못 나가면 어떻게 하나, 생신은 앞당겨서 해드리는 건 괜찮지만 뒤로 미루는 법은 아니라던데 하면서 꽤나 걱정을 했었다. 다행히 생신을 20일 앞두고 보석으로 풀려나서 생신잔치를 준비하던 중에 또 문제가 생겼다.

바로 생신날에 재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판기일을 연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없이 생신잔치를 사흘 앞당겨서 준비하고, 생신과 잔칫날이 다른걸 감추기 위해서 기념타월엔 음력 생신일인 「2000년 8월 24일(음)」로 수를 놓았다. 기념타월을 주문 받은 공장에서도 백수(百壽)기념타월은 처음 만들어 본다며 신기해했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내게 팩스로 보낸 디자인에 백수(百壽)가 아닌 백수(白壽)로 되어있어 질겁을 했고, 모친의 원불교 법명인 치덕(致德)이 치덕(治德)으로 되어 있어서 즉시 고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면 아무리 기계로 놓는 것이지만 자수로 글씨를 수놓는 일은 타월에 도장을 찍는 것보다 시간도 훨씬 더 오래걸리고, 쉽게 글씨를 고칠 수도 없어 행여 오자가 생기면 시일이 촉박해서 다시 만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모친은 내 고향인 개성에서 소학교[정화(貞和)]를 졸업한 후, 안국동 창덕여고 자리에 있던 한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여고)를 졸업하셨다. 개성에서 서울까지 160리 길을 매일 통학하실 때, 새벽 4시에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안국동 로타리의 학교까지 전차를 타고 와도 7시가 채 안되었으므로, 집에서 떠날 때 준비해온 2개의 도시락 중 아침 도시락을 자시고, 한숨 자고 나면 첫 시간이 시작되었다는데, 나는 모친이 그 먼 거리를 통학하신 것이 100세 장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마포 서강에서 안국동에 있는 학교까지는 지름길로 빨리 걸어도 대개 1시간 반 이상 걸렸는데, 매일 걸어다녀서 전차표를 하루 4장씩 용돈으로 모았던 내가 여지껏 헬스는 커녕, 흔한 골프나 등산 등 아무 운동도 안하는데도 남들만큼 건강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여튼, 모친은 현재 생존해 계신 최고령 동문이시라고, 엊그제 백수(百壽)타월을 받으시면서 박달회 회장이신 박양실 경기여고 동문회장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르긴 해도 모친이 대학교육을 받으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현재는 동경여자미술대학교)의 최고령 졸업생 이신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내가 지난 3월에 서울시의사회장에 당선된 후 의약분업 때문에 조용한 날이 없고 결국 옥살이까지 한 금년에 백수(百壽)를 맞으셨고, 미국에 있는 세 명의 형들 중 한분[성수(??)]만 참석한데다, 재판날과 중복되어 날짜를 앞당기다 보니 모친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고명사위[백낙청(白樂晴)]도 외국의 학회때문에 못 참석하게 된 게 퍽이나 속상했다. 그렇지만, 정식초청장을 내지 않았는데도 많은 분이 축하해주셨고, 한 달이 지난 요즈음도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는 기분 좋은 핀잔을 들으면서, 어쨌거나 모친의 백수연(百壽筵)이 성대하게 치뤄 진 걸 흐뭇하게 여긴다.

환갑(還甲) 다음해를 진갑(眞甲)이라고 해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완전히 한바퀴 돈 것을 축하하듯, 혹시 진백수(眞百壽)는 없는지 모를 일이다. 아직도 치매는 커녕 바로 위 남수(南?)형이 10여년 전에 보내드린 왕눈이 다이얼로 직접 전화를 거실 정도로 정정한 모친께서 일년만 더 살아주신다면 남들이 뭐라거나 진백수(眞百壽) 잔치를 떠들썩하게 벌릴 생각이다.

6·25나던 해 겨울, 첫째와 둘째형은 학도병으로 나가고, 중학교 1학년에 다니던 셋째형마저 한입이라도 줄일 겸, 고향에 남아계신 아버지께로 먼저 간다고 북진하던 영국군 탱크부대 하우스보이로 집을 나갔기 때문에, 충청도 산골에서 나와 동생만 데리고 어렵게 살던 때, 몸이 허약했던 내가 마침내 폐렴에 걸렸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에도 구하기 어렵다던 크리스탈·페니실린 주사를 눈을 끓인 물에 타서, 평생 한번도 놓아 본적이 없는 근육주사를 매일 내 궁둥이에 놓으셔서, 마침내 폐렴으로 죽어가던 나를 열흘만에 다시 소생시키신 모친이, 결국 사형제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은 내 곁에서 백수(百壽)를 맞으신 건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韓光秀, 사회복지법인 유린보은동산 이사장·서울특별시 의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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