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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은혜의집
서울교구 은혜의집
  • 박주명 기자
  • 승인 2000.08.25
  • 호수 10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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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쉼터·자율학교 설립한다

▲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에 자리잡은 은혜의집 전경.
▲ 10년간 계속된 고봉중학교(서울소년원) 원불교반 여름훈련을 마치고 기념촬영. 강해윤 교무(뒷줄 右측 2번째)와 위도원 교무(앞줄 右측 3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법신불 사은이시여! 이제 은혜의집에서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청소년을 위한 ‘쉼터’와 중학과정의 ‘자율학교’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이곳이 특별한 집, 특별한 학교가 되어 청소년들을 올바른 인생 길로 열어 주소서. 그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호념하여 주시옵소서!”

이 염원은 지난 4월16일에 결제한 ‘청소년 쉼터’와 ‘자율학교’ 건립을 위한 천일기도이다. 또한 금년 1월에 부임한 강해윤·위도원 교무는 고인이 된 길광호 교무가 생전에 낮고 소외된 계층을 위하여 교화사업에 헌신했던 정신과 그 유업을 이어가려는 130일째 다짐이다.

원기75년(1990) 신림동 재개발지구에서 길광호·강해윤 교무가 도시빈민교화에 주력한 은혜의집. 10년이 지난 오늘, 은혜의집은 소년원 아이들의 출소 후 보금자리인 청소년 쉼터와 인성교육을 통해 사회정착으로 이끄는 자율학교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

사실 신림동 달동네 안에 있던 은혜의집은 사회현장 교화체험을 하고자 하는 젊은 교무들의 마지막 보루처럼 희망과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원기81년(1996) 후반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로 장소를옮긴 후 길 교무의 외로운 걸음이 시작되면서 차츰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그후 작년 9월30일 ‘헌산(?山)’이란 이름으로 유명을 달리하여 우리 곁으로 다시 오고서야 그의 삶이 회자됐다. 많은 사람이 훌륭한 교무였다고 아쉬워들 했지만 정작 그가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자칫 과거완료형으로만 남아 있을 길광호 교무의 무아봉공의 헌신적인 삶. 그가 꿈꿔 왔던 ‘청소년 선도마을’을 미래진행형으로 이어가려고 강해윤 교무와 위도원 교무가 발벗고 나섰다. 선도마을은 지도교사가 비행청소년들과 함께 살면서 따스한 가정의 역할을 다해 주면서 사회로 정착시키기 위한 중간단계의 집이다.

강 교무는 “대안학교란 형식이지만 이 자율학교는 제도권 교육에서 중도탈락한 이들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정말 꼴통들을 위한 학교”라고 강조하면서 “이미 비행을 저지르고 처분을 받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최종학력은 중학교를 목표로 한다. 60명을 넘지 않는 소규모의 학교를 끝까지 유지시키겠다”고 밝혔다.

현 은혜의집 아래 공터에 세워질 자율학교는 1층 130평, 2층 120평으로 2002년 3월 개교를 목표로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이 자율학교는 은혜의집을 통해 성자적 삶을 살다간 헌산 길광호 교무의 거룩한 생애를 높이 드러내고, 소외계층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실현하고자 한 그의 유업을 받들어 ‘헌산학원’이라 부르게 된다.

이같이 막연한 계획들이 현실화 될 수 있었던 데는 강남교당 서타원 박청수 교무의 후원이 컸다. 더하여 박 교무는 오는 9월5일에 받게 되는 ‘일가상(一家賞,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를 기리는 상)’ 수상 기념으로 “상금 2천만원을 은혜의집 자율학교의 씨돈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밀어주고 있다.

원기81년 6월 은혜의집이 신림동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이전할 때에도 강남교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용인 은혜의집은 대지 2백평에 건물 2동(50평)을 마련한 후 주변토지 1천평을 더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길광호 교무는 주민들을 설득하고 무리한 요구도 수용하면서 진입로 80m를 개설했다. 그는 서울소년원에서 퇴원한 아이들을 집에서 돌보며, 서울구치소와 서울소년원의 교정교화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또한 길 교무는 자율학교가 들어설 황무지에 거름을 몸소 나르며 텃밭으로 가꿨다. 은혜의집 주관으로 지난 8∼11일 열린 고봉중학교 원불교반 여름훈련(10년간 계속)에도 그 텃밭에서 나온 옥수수와 고추를 공양하기도 했다. 위도원 교무는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부터는 자네가 할 일이다”며 길 교무로부터 교정교화를 병상에서 인계 받았다. 위 교무는 ‘자네’란 의미를 ‘교단의 공부인들’이라고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길 교무는 1인 다역을 하면서 가끔 통신에 ‘너무 힘이 든다’고 호소해 왔다. 보좌교무도 요청했지만 오지 않았다. 그는 병마가 찾아온 줄도 모르고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시나브로 거룩한 빛이 꺼져만 갔다.

길 교무는 생의 마지막 14일을 그가 개척했던 용인 은혜의집에서 보내고, 익산 호스피스의원에 온지 이틀만에 한줌의 재로 화했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여행을 가듯 떠나세’라는 동기생 말에 “난 여기 와서 다 정리했어”라며 강해윤 교무가 병상에서 봉독해 주는 대산종사법문을 들으며 39세의 짧고 고결한 생을 마감했다.

오는 9월30일은 길광호 교무 열반 1주기이다. 은혜의집에서는 이날 오후3시 서울회관에서 『아름다운 성자 헌산 길광호 교무』문집 봉정식을 갖는다.

강해윤 교무는 “이날 행사를 통해 우리 교단에도 젊은 성자가 가까이 있다 갔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알리려고 한다”며 “안타까운 그의 유업을 계승하겠다는 다짐과 앞으로 사업을 구체화하려는 모임이다”고 밝혔다.

그의 삶은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에게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신림동 달동네에서 함께 일했던 안재란(안젤라 미스투라, 국제 가톨릭형제회원)씨는 “그 자그마한 오두막집, 비좁디 비좁은 방이었지만 길 교무님은 당신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었던 창시자의 모범과 영향력을 간직하고 계셨다”며 “다른 사람들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셨고,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와도 함께 일할 줄 아셨다”라고 추모의 글을 적고 있다.

강칼라 수녀(천주교 작은자매전교회)는 “길 교무님은 진실하고 선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분으로 비록 짧은 생을 마쳤지만 굵게 살으셨기에 그 성덕은 언제까지나 저희들에게 남아있을 것이다”고 했다.

윤마리아씨는 “길광호 교무와 강해윤 교무의 만남은 뭐라 할까? 하느님의 선물이었다”며 “길 교무님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도 같은 분으로 아마 하늘에서도 그 분이 필요했었나 봅니다”고 그리움을 토로했다.

서춘배 신부는 “농담을 할 수 있고, 유머도 있고,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되어 준 분이었다”며 “세상 속에서 일반대중과 함께 특히 몸을 던져 가난한 이들의 공양으로 내놓은 것만 같다”고 밝혔다.

강해윤 교무는 “좋은 파트너였다”며 “무엇을 이어갈까 고민하다가 그 친구가 끝까지 추구했던 소외계층을 향한 특수교화를 계속하기로 했다”면서 빈민교화를 위한 또 다른 한 팀(여성)이 수도권에서 용기있게 나서주기를 바랬다.

지금 그는 고단한 생을 잠시 뒤로하고 쉬면서 여행 중일까. 길 교무는 전무출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헌신(?身)’이란 삶의 표준을 무언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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