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이 별 날이 아닐 테지만 ‘새해’라는 단어에 스며있는 신선함과 변화에 대한 작은 희망이 우리를 들뜨게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작은 떨림을 던져주는 말이 또 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내가 행복할 때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고, 어려운 경계를 당했을 때 또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이들이 가족입니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새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주



소년은 올해 열 살 초등학교 3학년이다. 강물에 반사한 반짝이는 햇빛처럼 밤 내내 재래시장의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산중턱 연립주택 2층에 살고 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어머니가 한 달에 하루만 쉬는 날을 기다려서 미장원으로 데려가 커트만 친 소년의 머리는 바가지를 씌워 놓은 듯한 헤어스타일이다. 그래서 얼굴이 머리숱에 파묻힐 듯 보인다. 다소 겁먹은 듯한 커다란 눈은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눈빛이고, 얼굴은 늘 창백하고 이빨 자국이 나게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목에 건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소년은 늘 혼자였다. 오후 3시에 시작해서 5시에 끝나는 속셈학원을 다녀와도 혼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년의 어머니는 식당일이 끝나는 밤 9시가 지나야 귀가 했고,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언제나 더 늦다. 딩동댕TV 5시 개구쟁이 어린이 프로도 끝나면 정말 멀미라도 일으킬 것만 같이 심심해서 소년은 견딜 수 없었다. 하루에 30분만 아버지와 약속한 인터넷 게임도 더 할 수 없다.

소년은 거실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주방으로 계속 빙빙 돌아다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찬장 문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안방 장롱 문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가끔 백 원짜리나 오백 원짜리 동전 몇 닢이 들어있는 장롱 속 아버지 양복 호주머니를 확인하는 것도 소년이 심심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어쩌다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얻으면 밖으로 달려가 문방구 가게에 설치한 카레이스 전자 게임을 30분 즐길 수 있다.

어느 늦가을 오후였다.

그날 소년은 아래 시장통에서 들려오는 야채 장수의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거실 바닥에 다리를 뒤로 꺾어 올린 채 엎드려 일기를 썼다. 이따금 일기 쓰기를 멈추고 볼펜을 손등 위로 빙글빙글 굴리며,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어서 식당 영업을 쉬고 일찍 돌아오는 어머니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고 현관 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곤 했다. 늦가을 뽀얀 햇살이 연립주택 베란다에 깔렸다. 소년은 창을 통해 노란 은행잎이 소리 없이 떨어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빨 자국이 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울먹울먹 울음이 복받칠 것 같았다.

“은행나무도 겨울이 되면 무서운가 봐.”

소년은 은행잎이 떨어지는 걸 이렇게 썼다가 서둘러 지워버렸다.

소년의 아침 등교 길은 남들이 다 이용하는 고급 승용차가 즐비하게 주차해 있는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는 길이지만, 하교할 때는 재래시장 뒤 꼬불꼬불 오르막 쪽방촌 골목길이다. 이렇게 하교 길이 다른 것은 소년만의 비밀이었다. 주로 머리가 허연 독거노인들만 사는 쪽방이 다닥다닥 연결된 오르막길은 이상하게도 죽음의 호수처럼 고요하다. 바람의 유동조차 없는 도시의 외곽, 버림받은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이따금 아래 재래시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소란스런 소음만이 이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유일한 징표였다.

여긴 주로 독거노인들이 살았다. 그들은 두 무릎이 귀까지 올라오게 쪼그리고 앉아 햇살맞이를 했다. 언제나 턱을 덜덜덜 떨었고, 눈 가에 늘 축축한 물기가 돌았고, 지팡이에 의지해 언제까지나 하늘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소년은 이곳에서 한 노파를 알았다. 학교 친구들은 물론 엄마 아빠에게도 그건 비밀이었다. 하교 길에 소년이 이 길을 이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할머닌 혼자 사는 게 좋아?”

소년은 할머니 코앞에 앉아 이렇게 물었다.

“그래 혼자 사는 게 좋다.”

“거짓말.”

소년이 혀를 낼름 했다.

“인석아, 내가 거짓말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

“할머니 눈물 보고.”

노파는 팔을 휘둘러 때리는 시늉을 했다. 노파 눈은 늘 진적진적 젖어 있었다. 소년이 그런 노파를 향해 정말이지, 그렇지 하고 약을 올렸다.

“그런데 왜 턱을 덜덜덜 떨어요?”

소년이 또 물었다.

“겨울이 되니까 그런단다. 나 같은 노인은 겨울이 젤 두려워.”

“저도 밤마다 가슴이 덜덜덜 떨리는데 겨울 때문인가요?”

“넌 키가 크려고 그래.”

소년은 이렇게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빨도 빠지고 손톱도 빠지고 발톱도 빠진 노파와 친구였다. 노파는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입꼬리에 침을 질질 흘리고 지팡이를 쥔 손도 덜덜덜 떨었다.

그러나 소년은 쪽방 촌 할머니 이야기는 일기에 쓰지 않았다.

비발디 사계 봄 멜로디의 차임벨이 울리고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다. 왁자지껄한 소음, 까르르 무너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3학년 교실 복도 끝에서 소년은 두 손을 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벌이 견딜 수 없어 몸을 비틀거나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일기 숙제를 안했기 때문이다.

“왜 일기를 안 썼느냐?”

선생님이 작은 회초리로 소년 어깨를 툭툭 쳤다.

“쓸 게 없어요.”

“또 변명.”

이번에는 탁탁 소리가 나게 책상 모서리를 쳤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소년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일기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해서 쓰는 거야. 생각하면 쓸게 많잖니. 동생과 다툰 이야기를 써도 좋고 할머니 이야기를 써도 되고.”

“사실 저는 그게 탈이에요. 생각이 너무 많거든요. 전 하루 종일 엄마 생각만 해요. 왜 시시때때로 엄마 생각만 나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밤 9시가 지나야 돌아오는데요. 버스도 가끔 빠질 때가 있잖아요, 또 버스를 놓쳤으면 어쩌나, 아버지는 언제 오나 그런다니까요.”

“안 되겠다, 낼 부모님 모시고 와라.”

선생님은 화가 났다.

“부모님은 밤 9시 지나야 오실 수 있는데요.”

선생님은 기가 막혔다.

“내일은 꼭 일기를 써 와야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책상 서랍을 열고 토끼그림이 그려진 새 일기장 한권을 꺼내 소년에게 줘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가방을 내던지고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훔친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쥐고 쪽방촌 골목으로 달려갔다. 해가 저물기까지, 밤이 되어 엄마와 아빠가 올 때 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창창했다. 자기가 왜 쪽방 촌으로 달려가는지 소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말총 모자를 쓴 할아버지 그림이 그려진 5천 원짜리 한 장, 그러나 별루 기쁘지도 않았다. 쪽방 촌 언덕을 오를 때는 소년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울고 싶지만 울 수도 없었다.

소년이 입술을 깨물며 슈퍼마켓에서 박하사탕과 코카콜라 한 병을 사들고 노파의 캄캄한 방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늦가을 해가 기운 후였다.

“박하사탕 줄게 우리 할머니가 되어주세요.”

소년이 박하사탕 한 봉지를 쪽방 안으로 던지며 약간 화가 치민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야. 그건 가짜 할머니란다.”

“가짜라도 좋아요.”

이번에는 코카콜라를 던져 넣었다.

“네가 날 아무리 유혹해도 소용없어, 난 네 가족이 아냐.”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왔다

그날 밤 소년은 엄마와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혼자 잠이 들었다.

소년의 엄마는 여느 때처럼 9시가 지나서 돌아왔고, 아버지는 10시가 되어 차례로 귀가했다. 부부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손에 볼펜을 쥐고 잠이 든 소년을 보았다.

“이 녀석은 언제나 이렇다니까.”

소년 엄마는 소년을 안아서 침대에 눕히며 이렇게 투덜댔다. 그리고 소년 가슴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선생님이 준 토끼 그림이 그려진 새 일기장이었다.

“나에게 가짜할머니라도 있으면 좋겠다. 문방구서 파는 쫀드기 과자를 사 먹을 수 있게, 좀 무섭기는 하지만 용돈을 주는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계셨으면 좋겠다. 아니 나에게 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동생이 있어도 좋겠다. 가족 중에 내가 마음대로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누이가 있으면 더 좋겠다. 아버지가 술이 취해 늦게 돌아오는 밤이면 우리 가족 셋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나는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피가 같은 사람들이니까 내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도 신문에 피가 모자라다는 광고를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족 중에 언제나 한 사람은 집에 남아 있을 삼촌도 있으면 좋겠고, 고모도 이모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문을 열어주는 진짜 할머니가 계시면 더욱 좋겠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 ‘아버지의 표장’으로 등단
창작집《兄을 위한 미학》
장편소설 《구멍》《개구리,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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