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정진 12∼19일 배내청소년훈련원에서 열린 대학선방 참가자들이 단전주 선법으로 용맹정진 하고 있다.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은 둘이 아니다. 수행에 있어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의 삼학 역시 병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굳이 나누어보자면 수행이 근본된 신앙이 펼쳐져야 하며, 복잡 다단한 현대사회와 원심력이 강해지는 현재의 교단상황은 다시금 수행의 현재적 상황을 되묻게 만든다.

눈 푸른 이들, 다시금 추어잡고 개교100년을 열어가자.


정시선 정처선이
무시선 무처선의 기초


하나, 관찰!

법당 창 틈으로 새벽 햇살이 파고들어 빛나는 곱디 고운 교무님의 자태, 정성스럽게 빗어넘긴 머리, 일원상 앞 좌복 위에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고 좌정하신, 목탁치며 울리시는 독경소리에 나는 내 삶을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

좌선후 교무님은 흙이 묻으면 안될 것 같은 그 고운 손으로 화단의 잡초를 뽑았다. 선과 생활의 일치…더 이상 산사의 모습이 내겐 동경스럽지 않았다.

원불교 수행, 일상속의 수행…정시선(定時禪)에서 무시선(無時禪)으로 가는 그 수행의 멋이 나를 사로잡았다.

둘, 첫 경험!

중학교 다니던 어느날 저녁…교당에 손님이 왔단다.

법당에 따라가니 한복차림에 큰 염주 굴리던 대 여섯명의 선인들은 둥글게 앉더니 목탁소리에 맞춰 ‘나무아미타불’을 쉼없이 외쳐댔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운곡이지만 뭔가 끊임없는 윤회를 상징하듯 이어지는 나무아미타불. 남자들만의 중저음으로, 그러나 신비함을 감춘 그 웅장함은 촛불하나에 몸을 내맡기고 법당을 가득 채웠다.

그 끝없는 소리의 수레바퀴에 놀라며, 따라하며, 또 조심스레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살피기에 바빴다.

나는 그것이 ‘염불’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첫 경험이었다.

셋, 꿈!

수행의 초보이자 기초가 되는 수양. 원불교 수행은 삼학이 균등해야 하지만 요즈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정시선·정처선 수양이다.

무시선·무처선이 강조되다보니 정시선·정처선이 소홀히 되고, 정시선·정처선이 기초가 된 무시선 무처선이 되어야 하는데 자행자지의 말 뿐인 수행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원불교의 푸른 생명력…

그 순수함의 단초는 아침·저녁 선과 염불의 열기이다. 출가자들도 이것으로 먼저 교단의 푸르름을 열어야 하며, 재가 대중들도 정시선으로 거듭나야 개교100년 원불교의 모습이 초기 교단의 그 모습으로 열린다.





정산종사님은 “불공에는 자기불공과 상대불공이 있는 바 이 두가지가 쌍전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불공하는 공식을 배우는 것”(권도편 13)이라 했다.

평생 원불교학을 가르친 한정석 원로교무는 “교리체계상 불공은 신앙문에 속하나 실천면에서 불공과 수행은 일치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법문으로 수행과 신앙을 굳이 나누어 보자면 자기에게 하는 불공이 ‘수행’이며, 상대에게 하는 불공이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자기불공’은 각자의 마음공부를 말하며, 마음공부는 삼학수행을 이른다. 삼학은 정신수양(염불·좌선), 사리연구(경전·강연·회화·의두·성리·정기일기), 작업취사(상시일기·주의·조행)를 말한다. 대종사님은 특히 “정신의 수양력을 얻어서 온전한 정신이 회복되는 머리에 일과 이치에도 분석이 밝게 나며 자주력 정신을 얻게 된다”고 하며 “사람의 마음도 좌선으로 온전하고 적적한 자리를 찾아 그쳐야만 성리의 진면목을 본 것이며, 따라서 밝은 지혜광명을 얻게 된다”하였다.(회보 15호, 원기20년 2·3월) 삼학은 병진해야 하지만 요즈음처럼 동적인 사회에서는 이 법문을 새겨 정시선·정처선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불공’은 형상있는 상대처(천지만물)에 하는 실지불공과 형상없는 상대처(허공법계)에 하는 진리불공으로 나눌 수 있다.(교의품 16) 원불교의 모든 교리는 일원상에서 출발한다.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교의품 4) 하였으니 상대불공법에 의한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신앙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정산종사님께서 자기불공이 근본이 된다는 것은 수행력이 철저해야 상대불공(신앙)이 잘된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수행과 신앙이 둘이 아니나 수행이 근본되어야 하며, 수행에 있어 삼학은 병진되어야 하나 현대사회와 현재의 교단상황은 정신수양의 가치를 더욱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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