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품 30장

대종사 송도성에게 '과거칠불(七佛)의 전법 게송을 해석하라' 하고 덧붙이셨다. '큰 솥의 국물을 다 마셔 보아야 그 솥의 국 맛을 아는 것이 아니다. 7불 게송만 알면 팔만장경을 다 알 수 있다'(<선외록> 불조동사장 3)

전법게송은 대개 임종에 당한 도인이 깨달음의 내용을 짧은 싯귀로 요약하여 전한다. 깨달음은 오묘하고 무량한 것이어서 팔만장경으로도 담기에 부족하지만, 그것을 게송 한 두 줄로 요약할 수 없다면 또한 뛰어난 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

《아함경》을 보면 비바시불을 비롯한 과거불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석존께서는 과거칠불에 연원을 충실히 대셨으므로 주세불이 되셨다. 대종사는 석존께 연원을 대셨다. 대산종사는 연원을 댈 줄 모르면 참 도인이라 할 수 없다 하셨다. 게송과 연원, 이것이 본 장의 첫 주제이다.

다음 주제는 법과 무법이다. '법은 본래 무법(無法)에 법하였고 무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로다.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에 법을 법하려 하니 일찍이 무엇을 법할꼬' 거듭된 중복과 비꼬임으로 보이는 석존의 게송은 사실 그 요지가 명쾌하다. '법은 원래 무법이지만 무법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한 사람이 팔만장경을 읽는 데 약 63년이 걸린다고 한 학자가 계산하였다. 임제선사는 사람을 괴롭힌 석가를 만나기만 하면 칼로 베어 개에게 주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우리는 석존을 만나도 임제를 만나도 눈물어린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법도 무법도 우리에게는 큰 은혜인 까닭이다.

법과 무법의 관계는 '변산 구곡로에서 서 있는 돌이 물소리를 듣는 소식(성리 11)'에 다름 아니다.

돌이 물소리를 듣는다는 소식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법이 법 없음에 바탕한' 이치, 즉 일원상은 그 테두리가 없는 진리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테 없는 진리를 알면 상 없는 행을 나투게 된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말한 바가 없고 내가 무슨 공덕을 지어도 나는 공덕을 지은 바가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에도 무법에도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하열한 근기를 위하여 한 법을 일렀으나, 그 한 법도 참 법은 아니라'고 하는 대종사의 참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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