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회 30주년 기념강연

▲ 일원과 사은·삼학의 도식
▲ 그림1 이문 개념도
▲ 그림2 신앙 수행 개념도Ⅰ
▲ 그림3 진리의 체상용적 표현
▲ 그림4 신앙 수행 개념도 Ⅱ
▲ 소광섭 교수(62)·개포교당교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미 켄사스대학교 대학원
미 브라운대학교 물리학과 이학박사
현 서울대학교 물리학부 교수
한국 물리학회 평의원
미국 물리학회·해부학회 회원

역임
한국물리학회 입자물리분과 위원장
한국물리올림피아드 위원회 위원장
한국물리학회 물리교육 위원회 위원장
2003.4 과학기술 포장 수상




"원불교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에 비해 앞서고, 모범적인 종교가 된 것은 ‘진리적 종교’이기 때문 "


원불교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에 비해 앞서고, 모범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진리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모토인 베리타스 룩스메아(Veritas Luxmea)도 ‘진리는 나의 빛’이란 뜻이어서 원불교와 더욱 인연이 깊다.

진리적 종교의 체계

원불교에서는 개교의 동기에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분명하게 밝혔고, 대종사님은 성리품에 “종교의 문에 성리(진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원만한 도가 아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34장)고 밝히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결국 “견성(진리)을 해야 고해를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일원상의 진리

원불교에서는 은혜로 표현되는 신앙과 삼학으로 대변되는 수행이 진리의 체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수심결은 ‘자신의 마음이 참 부처’, 대승기신론도 ‘중생의 마음이 일체현상과 본질을 총섭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같은 점에 비추어보면 일원은 ‘중생이 존재하고 작용하게 하는 근본’ 즉 중생의 본성이며,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모든 현상의 근원이기에 이를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전통 불교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원상의 진리는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규정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이문(二門), 왜 2인가?

진리를 인격적으로 표현했을 때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격적 표현의 전지전능은 원불교의 인과보응, 무소부재는 처처불상, 만물의 창조자는 우주만유의 본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원불교에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아울러 진공묘유와 생활시불법, 무시선 무처선은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에서 뭇생명이 생성(창조)되었고, 뭇생명은 또 하나인 근본으로 돌아간다. 창조는 은혜이니 신앙에 해당하며, 귀일은 수행에 해당한다. 그래서 신앙 일방이 아니라 신앙과 수행이라는 체계가 나온다. 즉, 위력을 얻고(신앙), 체성에 합하기(수행)까지 서원해야 한다.



삼학, 왜 3인가?

일반적으로 불교의 구조는 체용(體用)으로 설명되는데 둘의 연결을 위해 ‘상(相)’이 더해져 체상용(體相用)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칸트는 경험 이전의 순수를 범주(카테고리)라 했고, 경험의 법칙을 원칙(프린시플스)이라 했는데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이 도식(시마)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삼신불이라 하여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 있는데 보신불이 상에 해당되어 각각 범주, 도식, 원칙에 비견해 볼 수 있다.

이같이 본다면 수행도 체상용의 구조가 가능해지는데 그래서 양성(수양), 견성(연구), 솔성(취사)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사은, 왜 은혜이며 사은인가?

마슬로우는 ▷생리적 욕구(의식주) ▷안전의 욕구(건강) ▷사회적 욕구(소속감, 우정) ▷자기존중의 욕구(칭찬, 존경) ▷자아실현의 욕구(가치와 목적, 학문, 예술)를 일상의 은혜라고 했다.

이에비해 인간의 생명을 주고 삶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4은은 근본적인 큰 은혜이다.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교의품4장)라는 말씀에 의거 한다면 위와 같은 도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신앙의 대상, 수행의 표본인 일원상의 진리를 분석적으로 보면 0(공), 1(일원), 2(이문), 3(삼학), 4(사은)로 볼 수 있다. 이 수를 합하면 10(십인1단)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법어와 게송, 깨달음의 자체평가

일원상 법어는 깨달음의 자체평가라고 볼 수 있다.

즉 신앙(생성의 위력)은 원만구족 했는가? 지혜와 복락을 두루 갖추고, 일원상 진리의 은혜와 위력에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지를 묻는 말이다.

수행(체성에 귀일)은 지공무사한가? 시방 삼계가 다 나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말이다.

진리는 사량으로 보지말고 관조하라고 했다. 사량(결정론)은 신앙이라고 볼 수 있고, 관조(자유의지론)는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머리로 하지말고 자유의지로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 일원상의 진리가 내포하는 것이다.

정리 : 우세관기자 woo@w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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