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만난 전무출신 / 중앙총부 관리감 김 성 만 덕무
황혼녘에 출가해 영육쌍전 귀감
대종사 말씀하신 원불교 부처

좌선을 마친 새벽녘 송대를 지나 영모전 뒤 솔밭을 거니노라면 이어지는 선경이 득도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잠깐 틈을 낸 낮시간 보존구역을 지나 성탑까지 이어진 오솔길은 잘 전지된 소나무와 야생화가 종교성지임을 알려주고, 하루 일을 마친 뒤 총부를 가로질러 철길쪽으로 가면 황혼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중앙총부의 전반적인 조경은 자연과 합작해 소박하지만 품위있는 분위기를 끊임없이 빚어낸다.

말끔하게 정돈되고, 차분한 분위기의 익산 중앙총부…총부 관리감인 김성만 덕무가 있기에 가능하다.

김 덕무의 일은 중앙총부의 외형적 관리에 관한 모든 것이다. 좌선이 끝나면 분리수거 된 쓰레기 처리부터 드넓은 대지의 조경까지, 게다가 총부 구내의 모든 수리까지 도맡아 지휘한다.

김 덕무는 원기79년 55살의 늦은 나이에 출가를 했다. 대종사님과 출신지가 같은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가 고향이다.

영산에서 2차 방언공사가 한창이던 19살 무렵 형산 김형철 종사가 “나중에 교단을 위해 크게 쓰일 재목”이라 말했다. 결국 그 말씀이 출가로 이어져 2년뒤인 21살 때 출가를 단행했다.

변산 하섬해상훈련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나 집안의 녹록찮은 형편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다시 환속하여 자신만을 의지했던 가정을 일으키고 자녀들을 성장시킨 뒤 황혼녘에 인생 초반의 다짐을 실현시켰다.

김 덕무는 출가와 더불어 총부에서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사가가 총부와 불과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수도도량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늦출가에 따른 일과 수행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모든 교도들 마음의 고향이자 세계인들이 원불교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중앙총부를 오늘의 모습으로 가꾸었으니 늦출가의 의미가 충분하다.

하지만 내년에 퇴임을 앞두고있는 터라 김 덕무의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익산성지의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고, 뒤를 이어 관리할 상주 전문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생각으론 퇴임을 해도 계속 익산성지를 내 몸처럼 돌보겠다고 한다.

사촌동생인 김장원 교무(원창학원 이사장)가 교단의 중임을 맡고, 딸인 김법중 교무(송학교당)를 교단에 희사했다.

항상 묵묵히 땀흘리며 너털한 웃음을 터트리는 김 덕무. 하지만 일이 시작되면 예리한 눈매에 신형 엔진을 장착한 듯 힘차게 열중하고, 돌아서서 사람을 마주 대할 때면 다정다감한 시골 할아버지다.

시찰단 일행이 대종사께 “귀교의 부처님은 어디에 봉안했는가”를 여쭈었다.

점심때가 되어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니 “저들이 다 우리집 부처”라고 말씀하셨다.(대종경 성리품 29) 김 덕무는 원불교식 부처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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