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성 교도의 영산성지순례
그곳에 가면... 마음의 고향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 매화향 가득한 대종사 탄생가
▲ 내 기억속의 그 길
▲ 수줍은 영산원
▲ 텅비어 가득한 대각전
그곳에 가면... 마음의 고향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내 기억 속의 영산은 마치 모락모락 피어나는 안개 속 몇 그루의 미류나무 저편에 둘러 싸여 있는 고향의 초가집 같은 한 폭의 수채화 그림이다.

대학 갓 입학해서 찾아간 원불교 동아리,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 몇몇이 함께 겨울 수련회랍시고 길을 떠났었다. 그게 내가 영산과 맺은 첫 인연이었다. 그때 영산 성지까지는 들어가는 차편이 없어서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성지 부근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코끝을 때리는 찬바람, 그 겨울바람을 뚫고 등에는 며칠 먹을 쌀과 부식이 든 배낭을 짊어진 채 우리 몇은 그렇게 영산으로 터덜터덜 걸어들어 갔다. 매서운 바람에 곱아드는 손을 호호 불어서 얼어붙은 귀를 녹여가며 걸었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영산성지에서 우리를 맞아준 것은 단아한 모습의 초가집 영산원이었다. 대각전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대종사님이라면 영산원은 교무님같이 수줍고 해맑은 모습이었다.

영산의 그해 겨울은 왜 그렇게 추웠던지, 겨울 하늘을 감돌아 내리며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로 밤새 뒤척거렸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는 맑아진 머리와 가벼워진 몸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의 느낌은 교당에서 가는 성지순례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기억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4월의 일요일, 저녁 11시를 훌쩍 넘긴 그 시간에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차가 따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다시 한 번 내 모습과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나를 이해해주고 말없이 지켜주는 아내, “아빠,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늦은 시간에 영산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조심해서 잘 다녀와라”고 말씀해주시는 어머님, 아버님 모습도 떠올랐다.

대종사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주 짧은 잠시 동안이었지만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솟았다. 차가 출발한지 얼마 후 서해안고속도로를 접어들면서 빗줄기는 더 굵어 졌다. 굵어진 빗줄기만큼 솟구치는 눈물도 많아졌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삼십이 될 무렵 스승님을 마음에 모시게 된 이후로 대종사님의 이 법을 등대 삼아 살아오지 않았던가?

기도를 하게 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흘리게 되는 눈물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영혼을 맑게 해주는 약에는 눈물이 최고야. 눈물보다 영혼을 에너지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 기도할 때마다 자주 눈물을 흘리는 나 자신에게 눈물을 비극의 '카타르시스'에 비유하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경제적으로 세계에 손꼽히는 국가가 되었다.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이 땅에는 국제결혼 이주 여성들과 근로 이주민들이 늘어 가고 있다.



기도는 평화와 깨달음의 동력

그런데 이 분들이 없다면 국가의 발전과 성장 동력이 멈춰야 하는 상황도 올 수 있다. 이분들이 받아야 할 올바른 한국어 교육과 이분들 자녀 교육의 중요성이 우리 사회의 화두처럼 떠올랐기에 정부 역시 국제결혼 이주 여성과 근로 이주민이 꾸리는 다문화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민족도 오랜 세월 속에서 다른 민족과 서로 피를 나누고 문화를 교류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해오지 않았는가? 일찍이 백여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대종사님께서 깨우쳐 주신 최초법어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에 담겨 있는 ‘나눔과 존중의 정신’이 요즘 부쩍 내게 소명처럼 다가오곤 했다.

그래서 이번 순례 길에 익산에서 교단의 어른들을 찾아뵈어 이런 문제를 의논드리고, 남원 교당의 결혼이주민지원센터에 들러서는 서위진 교무님과 고세천 교무님께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떠나기 며칠 전부터 미리 연락과 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청년 대종사의 숨결을 느끼고파

시간은 새벽 여섯 시가 조금 지나갈 무렵이었다. 다시 휴게소에 들러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고, 영산 성지 가까운 곳에 차가 다다르자 26년 전 젊은이들 몇몇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배낭을 맨 채 걸어갔던 그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잠시 차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모았다.

대종사님이시여! 그 때 대종사님의 숨결을 느끼고자 이 길을 걸어갔던 그 젊은이가 지금 이렇게 서 있습니다. 26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는 않았지만 오늘 이렇게 대종사님을 뵙기 위해서 이 길을 다시 지나갑니다. 오늘 찾은 이 순례가 소중한 기연이 되어 제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인연들과 은혜를 나눌 수 있도록 호념하여 주시옵소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멀리 성지가 들어왔다. 성지의 뜰은 단아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대각전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법당의 정기가 확 밀려왔다. 법신불전에 간절히 사배를 올렸다. 대각전 법당에 눈길이 가자, 대종사님의 법문을 받들면서 법열에 차 있던 선진님들이 앉아 계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와서 조금 내려가니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의 영산원이 옛 모습 그대로 수줍은 듯 서 있었다. 이곳이 대종사님께서 머무셨던 장소라고 생각이 드니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더욱 정겹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영산원의 그 기운이 좋아서 한참을 그곳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조금 걸어가니 대종사님 이하 모든 분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영모원이 있었다. 마침 영산대학교 학생들이 8시 아침기도를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100일 기도 가운데 43일째 기도식이란다. 기도 끝 무렵 작은 대종사님들의 그 기도 서원처럼 서원과 신심, 공심, 공부심과 자비심이 살아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갑종전무출신처럼 살고 싶어졌다. 이 분들의 서원과 다짐이 귓전을 울리고 마음 한 켠에 자리를 잡을 무렵 내 머리 속에는 청마 유치환의 시 ‘생명의 서’가 떠올랐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오직 알라의 신만이/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그 열렬한 고독(孤獸) 가운데/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이 시대에 영산성지는 ?

우리에게 ‘아라비아의 사막’은 어디일까? 영산 성지는 어쩌면 이 시대에 잃어버리고 있던 청마의 아라비아 사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뒤로 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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