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이철행 원정사님 영전에

스승님! 지금 어디에 계시나이까.

스승님의 열반소식은 청천벽력이었나이다. 적어도 원기 100년까지는 계셔주시리라 믿고 있었기에 편찮으시다는 말씀 듣고도 쉽게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이 망극함을 어느 세월에 풀어야 할지 한이 되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저의 가족 모두에게는 정법회상으로 인도해 주신 스승님이셨고 자상한 아버지이셨습니다. 큰 오라버니의 담임선생님으로 인연이 되어 부모님을 원불교로 안내하셨고 지부장과 주무라는 교당의 주인으로 키워주셨기에 큰 언니를 비롯해 저희들의 출가가 이어졌고 다른 형제들 모두도 일원회상의 주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스승님! 제 나이 열다섯일 때 저의 아버지 영정 앞에서 통곡하시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그 뒤 홀로되신 어머니를 한결같이 살펴주시던 스승님은 저희 10남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아버지로, 인생의 상담사로 자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은 집안 대소사에 스승님을 모셨고 스승님의 뜻에 따르려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의 자상하고 원만하신 인품과 심법은 공사간에 스승님을 만났던 많은 인연들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스승님을 교단의 선진님으로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 또한 저에게는 홍복이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의 업적 중에 서울회관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가사용 승인 상태에서 대산종사님과 교단의 많은 숙덕 원로님들을 모시고 서울회관의 개관봉불을 마친 후 머리카락이 엉킨 것과 같았다고 하신 그 서울회관이 1년 뒤 준공되던 날 담담하다는 말씀으로 그 심경을 표현하심은 어떠한 순역경계에도 흔들림 없는 대처법이었으며 법력의 일단이셨습니다. 12년에 걸친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대산종사님의 유시를 받들어 그 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스승님의 비범하신 지혜와 그 법력이 계셨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스승님! 교역의 많은 세월을 서울회관에서 보내는 저로서는 더욱 스승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21년 전 서울회관 앞마당에 구타원 종사님의 공덕비를 세우실 때 그 비문에「원음만방」이라 새기셨습니다. 그 때 이곳에 방송국이 들어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지금 이곳에서 원음방송이 전파를 보내는 것 또한 스승님의 염원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자선기관에 계실 때는 자비 인정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셨습니다. 산업기관에 계실 때는 교단 경제를 충실히 하시면서도 공부하고 일하는 산 도량을 만드셨고 교단의 3대사업인 교화 교육 자선의 정신이 살아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교정원장 감찰원장 등 중요 직책을 맡으셨을 때나 퇴임 후 원로원에서나 늘 이사병행으로 적공정진하신 교화자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님께서는 이생에 교당 교무로서 교화하실 기회를 갖지 못하심을 애석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승님! 스승님은 어느 곳에 계셨든지 영육쌍전 이사병행하신 최고의 교화자이셨으며 정말 멋진 삶을 살으셨습니다. 남은 저희들에게는 못내 아쉽지만 마지막 가시는 일까지도 염원하신대로 하셨습니다.

스승님! 이제는 늘 마음 쓰셨던 교단사나 인연들에 대해서도 모두 놓으시고 경산 종법사님 부촉 말씀처럼 이사가 병행되고 지혜와 덕량이 구족한 힘있는 성자가 되어 일원대도의 결복기 교운을 열어 갈 교화의 대 부흥사가 되시옵기를 간절히 심축드리옵니다.

이관도 교무 / 원음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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