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법으로 인격이룬 인물 ② 양산 김중묵 종사

▲ 양산 김중묵 종사 (1920~1998)
양산 김중묵 종사는 1920년 김제 출생으로 원기26년 출가해 화해 익산 남원교당 교무와 총부 교화부장과 총무부장으로 봉직했다. 원기57년부터는 순교감으로 활동하며 전국 각 교당에 법풍을 일으켰다.

원기64년에는 인과설을 집대성하여 I인과의 세계 J를 저술 발간했으며, 인과의 진리에 관한 교리로 수백회의 훈련과 49재, 법회를 열었다.

일생을 걸림없고, 막힘없는 무심도인 무애도인의 삶을 살았다.



무심한 가운데 유심한 심법

양산종사의 일화 가운데 건망증에 관한 것이 많다. 주로 49재 약속을 잊었다거나 깜박 조는 사이 임피에 내려야 하는데 군산까지 갔다가 다시 왔다거나 하는 일화 등이다.

어느 해 여름 삼천포교당에서 지내면서 해수욕을 하고 강습을 나신 일도 있었는데 그해 가을 그 교당 교무가 훈련차 총부에 와서 양산님 방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니 “아 자네가 어디 교당에 있더라”하더라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소일담으로 오르내리곤 했다.

하나 양산종사는 그렇게 무심한 중에도 동지간이나 후진들 중에 챙겨야 할 일이 생기면 알뜰하게 살펴주었다. 그 챙김이 아주 간절하고 자상해서 어려운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버이 같은 정을 느끼게 했다.



중묵(重默)에서 중묵(中默)으로

대종사는 총부를 찾아온 양산종사에게 재주에 치우칠까 경계하여 중묵(重默)이란 법명을 주셨다가 뒤에 이제부터는 중도를 잡는 공부에 힘쓰라 하여 중묵(中默)이라 개명해 주었다.

양산종사는 사물에 대한 탐구심이나 집중력이 뛰어났고, 알고자 하는 의욕이 강하여 묻기를 좋아하고 끝까지 알려는 탐구력과 실험정신이 있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특이하고 엉뚱한 면 때문에 놀림과 핀잔을 받을 때도 있었으나 언제나 허심탄회하고 사욕이 없음을 알기에 좌우 동지들과 두루 친근하였다.



무애(無碍)중 유애하는 참 자유인

양산종사는 일상사를 접할 때는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랴'하는 심정으로 수월하게 대해 주었다. 하지만 당신을 관리하는데는 철저했다. 일과나 운동, 식사 뿐 아니라 선(禪)과 간경(看經)과 일기(日記) 등의 수행과정도 철저했다.

양산종사는 남을 용납함에 너그러웠고, 아랫사람들에게 권위나 위엄이 없었으며, 예절이나 인습에 묶이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안으로 수행에 철저했고, 무념해서 좋은 일은 무념하고, 유념할 일은 유념하여 늘 걸림 없는 가운데 가림이 있었고, 가림에 구속되지 않는 참다운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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