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봉공·감화의 심법 일관

▲ 여타원 김지원행 종사
1914년 부산에서 출생해 원기35년 일원상서원문을 듣고 감동하여 다대교당에서 입교했다.

오랜 투병생활을 교법실천으로 극복해냈으며, 옛 삼동원(신도안) 부지 매입과 대구 삼덕교당 설립에 큰 역할을 했다. 말년에는 총부 인근으로 이사해 정진했으며, 원기76년 출가위에 승급해 종사의 서훈을 받았다. 원기88년 세수 90세를 일기로 열반.


무아봉공·감화의 심법 일관



서원문에 감동해 입교

하루가 정기·상시훈련

감내하고 보은한 일생






삶의 원동력 ‘일원상서원문’

입교의 계기가 된 ‘일원상서원문’은 여타원 종사에게 생활의 원동력이자 건강의 선약이었고, 마음의 등불이었다. “어떤 걱정도 서원문 세 번만 읽으면 후련해지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힌다”며 모든 어려움을 서원문과 함께 극복해나갔다.



닳아 헤진 초판본 교전

여타원 종사의 하루하루는 끊임없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훈련 없는 공부는 지속이 안 되고 수박 겉핥기”라며 하루 생활을 좌선, 기도, 염불, 교전공부 등 정기훈련과 무시선 무처선 등 상시훈련과목으로 설정해 꾸준히 정진했다.

어느 날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된 부군을 간병하면서는 매일 아침 식사 전 교전 한 대목씩을 보기로 약속했다. 결국 1962년 초판 원불교교전이 닳을 정도로 읽어 교전을 외울 정도였다.

또한 스스로 10년 기도를 결제해 일원의 진리 속에 낙원세계가 건설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무아봉공으로 임한 교단사업

교단 일을 하는 데는 무아봉공의 마음으로 임했다.

대가족 살림으로 넉넉하지 못했으나 쌀을 팔면 그 자리에서 교당 것을 떼어놓곤 했으며, 집에 선물이 들어오면 조금 싼 것으로 바꾸고 남은 돈을 보태어 교당 사업을 했다.

부군의 전근으로 대구에서 생활했을 때는 항타원 이경순 종사의 염원을 받들어 삼덕교당 설립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종로교당에 다닐 때는 우연히 듣게 된 신도안 터 매입소식을 듣고 큰아들 결혼자금을 선듯 희사해 불종불박(佛宗佛朴) 바위가 있는 터를 구입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인과의 이치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는 실천이었다.



사심없이 따른 스승님 가르침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는 일호의 사심이 없었다.

은모녀를 맺은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의 “친정, 시가 합쳐 16남매 가족이니 휴지통이 되라”는 법문을 받들어 일생동안 괴로우나 즐거우나 감내하고 보은하는 삶을 살았다.

대산종사의 “정신, 육신, 물질로 다 바치라”는 법문을 받들고 “산 경전을 보게 하시고 자력생활을 하게 하셨다”며 공부를 계속해 결국 생전 출가위에 이르는 대 공덕을 나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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