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종사탄생100주년 기획연재 1. 주산종사의 생애

▲ 동선을 마친 후 입선 동지들과
▲ 개성교당 교리강습을 마친 후 교도들과 함께, 앞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주산종사.
올해는 주산 송도성 종사의 탄생 1백주년이다. 주산종사는 정산종사의 친 아우로 함께 대종사를 보필했다. 해방 직후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이끌다 득병하여 젊은 나이에 열반했으나 그의 짧은 생애는 교단 만대에 사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11월 주산종사 1백주년을 맞는 함축된 사업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앞두고 <원불교신문>은 주산종사에 대한 추모 존숭의 뜻으로 생애와 사상, 좌담을 연재한다.

이번 호는 도봉교당 송인걸 교무가 ‘주산종사의 생애’를 조명한다.


원불교의 꿈, 주산 송도성 종사!


“학림(學林)을 개설하여 새 시대 지도자를 양성하고, 금강산에 선방을 설치하며, 총부를 서울로 옮겨 이 나라와 세계 교화에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여야 겠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이 나라 대한 조선! 일찍이 일제 치하의 질곡에서 제생의세(濟生醫世)의 큰 경륜과 포부를 가지고 개교한 불법연구회! 바로 우리 원불교 새 회상!! 당시 수위단 중앙으로서 친형이자 종법사인 정산 송규 종사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며 총부 교정원 총무부장의 요직을 맡아 전재동포구제사업을 진두지휘하던 주산 송도성 종사(1907∼1946)! 바로 그가 구상하고 결행을 앞두고 있던 웅장한 포부였다.

천재는 단명하다던가? 이런 주산 종사가 전재동포구제사업 중 환자에게서 옮겨온 발진티푸스가 발병하여 40세의 꽃다운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고, 총부 서울 이전 등 굵직한 교단 혁신과 교화 발전의 추이는 주춤하고 말았다.

소태산 대종사 떠나시고 주산 종사 마저 가시니 대중의 마음은 허퉁하고 슬프기 이를데 없었다.

정산종법사는 친제 도성(道?)의 종재식에서 이렇게 설법하였다.

『오늘을 당하여 할 말이 없으나, 여러분이 나보다 더 슬퍼하니 그 정의(?誼)를 가히 알 수 있으며, 대중이 한결같이 아까와 하는 충정을 보니 주산(主山)에 대하여도 좋은 일이요, 우리 회상으로도 좋은 기운이 도는 것을 느끼노라. 일전에 한 교우가 무수히 낙루하며 말하기를 “우리 회상이 발전의 한 고비에 대종사 떠나시고 주산까지 가니 이것이 우리에게 큰 비운(?運)이 아닌가”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그대는 큰 공사판에 가 본 일이 있는가. 큰 공사판의 도감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공사장에만 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도 볼일이 있으면 이쪽 일 끝나기 전에 저쪽에 가 보기도 하고, 미리 준비할 것이 있으면 준비를 해 오기도 하며, 또 쉴 때면 잠시 쉬기도 하듯이, 한 회상의 큰 주인들도 혹은 동, 혹은 서에 바쁘게 준비할 일이 있기도 하고, 또 잠시 쉴 일이 있기도 하나, 큰 눈으로 볼 때에는 결국 다 한 일판 한 일이라, 너무 슬퍼 말라”고 말하였노라.』(정산종사 법어 생사편 14장)



대종사의 좌우 보처불

대산 김대거 종법사는 법문을 통해 주산 송도성 종사가 그 형인 정산 송규 종사와 더불어 형제가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즉 후천개벽의 새 주세회상인 원불교 새 부처님의 좌우보처불(左右補處佛)임을 밝히시었다.

과거 석가모니불 회상의 문수(文殊), 보현(普賢)보살에 비유하였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여래의 좌우보처불이듯이 정산, 주산 종사 형제가 소태산 여래 부처님의 좌우보처불이라는 말씀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요, 보현보살은 실천행을 상징하는 보살이시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 주산 종사 형제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셨다. 얼마나 그 두 사람을 사랑하셨나는 다음의 이야기가 증명하고 남는다.

대종사께서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전해진다.

“성주 야성(冶城) 송씨라면 저 날아가는 까마귀도 반긴다.”

그리하여 형은 대종사의 법통과 종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되었고, 아우는 대종사의 서랑(壻郞, 사위)이 되었다.

교단 초창기 역사를 살펴보면 정산, 주산 종사 형제가 소태산 대종사의 좌우보처가 되어 교단의 중대사를 당할 때마다 불이(不二)의 신성으로 보필의 도를 다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종사께서 얼마나 이들 형제를 신임하고 사랑하셨는가는 <대종경> 신성품 18장의 법문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내가 송규 형제를 만난 후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 한 일과 두 번 시켜 본 일이 없었노라.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나니라.”



형을 따라 출가의 길 나서고

7살 터울의 형에 이어 선비의 고장 경북 성주(星州)에서 4백년 전통의 양반 유가집에서 좋은 부모를 정하여 이 세상에 몸을 받으신 천재적 성자(聖者)! 주산 송도성(主山 宋道?) 대원정사(?圓正師, 대각여래위)!!

유학이 도저(到底)한 조부와 부친(구산 송벽조 교무)으로부터 어린 나이에 학문을 배워 문리(文理)를 깨우친 주산 송도성 종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스스로 깨우치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 소년! 인정(人?)있고 다정다감한 인간미 넘치는 그는 일찍이 시집온 형수(중타원 여청운)를 친 누님처럼 따르며 좋아하였고, 하나뿐인 시동생으로서 익살을 부려 시집살이에 어려울 수 있는 형수의 마음을 녹여내었다.

1919년 음력 9월달! 13세 소년은 조부와 부모, 형수와 더불어 괴나리 봇짐을 지고 형님이 스승님을 만나 도덕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전남 영광을 향하였다.

그리하여 부친의 안내로 영광 길룡리 구간도실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뵈옵고 제자되기를 청하였다.

어린 소년을 접한 소태산 대종사는 그 뜻이 기특하고 가상하여 그 연유를 물으신다.

“부심자(?心者)는 지광지대물(至廣至?物)이니 수련정신(修練精神)하여 확충기지대지심이이(擴充其至?之心而耳)입니다.(무릇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넓고 큰 것이오니 정신을 수련하여 그 지극히 큰 마음을 확충하고자 함입니다.)고 답하는 천재 소년을 보시고 감탄하시며 “네가 도의 성품을 이미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이라 이름하거라”하시며 대종사, 그 법명을 지어 주셨다.

이어 대종사와 구산 송벽조 선진은 장차 자녀를 서로 결혼시키기로 묵약하고 송도성과 대종사의 딸 박길선(청타원)을 서로 바꿔 키우시었다. 이리하여 14살부터 도성은 길룡리로 와 대사모(십타원 양하운)님의 사랑을 받으며 대종사 측근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원기 7년(1922) 16살 되던 해에 부안 변산을 찾아 출가하며 그 유명한 출가시(出家詩)를 대종사께 바치고 전무출신을 결행하였다.

『헌심영부(?心靈父) 허신사계(許身斯界) 상수법륜(常隨法輪) 영전불휴(永轉不休)(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



진리의 구경처를 두드리고

부안 변산 제법성지에서 출가 생활을 시작한 주산 송도성 종사! 그는 어린 나이에도 타고난 천재성과 학문의 식견으로 소태산 대종사께서 변산에 4년여 머무시며 교법을 초안할 무렵 형과 더불어 시봉과 보필의 혈성을 다바치었으며, 특히 대종사께서 설하신 봉래(蓬萊) 법설 즉 견성 성불의 무궁무진한 성리(?理) 법문을 모두 수필하여 오늘날 <대종경> 성리품과 변의품이 나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나는 본래 사심이 없다”는 주산의 말씀처럼 타고난 청정 일심을 일사불란하고 올곧게, 그 지극히 넓고 큰 본래 마음을 수련하고 또 수련하여 <진경(眞境)>을 두드려 내 것으로 만들고 만다.

“찼다면 다북차고 비었다면 텅비어서 두렷한 거울속에 파도없는 잔 물결이 고요히 움직이나니 진경인가 하노라. 소리로 못전하고 동작으로 형용 못할 참극락 가는 길을 누구에게 물었기에 남먼저 찾아온 이들 홀로 즐겨하노라”

원불교 <성가> 109장 진경의 일부 가사이다. 이처럼 주산 종사는 <적멸(寂滅)의 궁전(宮殿)>, <심금(心琴)>을 비롯, 성품자리를 밝힌 주옥같은 시가(詩歌)를 남겼다.



원불교 교법의 사회적 실천에 앞장서다

주산 송도성 종사의 지혜는 저 불교의 아난존자에 비유된다. 석가모니불의 십대제자 가운데 다문(太聞)제일이 아닌가?

역사 의식과 기록 정신이 뛰어났던 그는 총부 연구부 서기로 있을 때 <월말통신>을 발간하였다. 수려한 문장이면서도 조금도 과장이 없고 간명하게 대의를 추려 핵심을 드러내는 글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시켰다.

주산 종사의 특장(特長)은 깨치고 아는 지혜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현실로 실천궁행하여 사회와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실천행에 있다. 그래서 불교의 보현보살에 견주는 것이다.

“오 사은이시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아무리 미소한 저에게라도 사은께서 그 힘만 밀어주신다면 분연히 일어나서 두 팔을 부르걷고 일터로 달음질하겠나이다. 오 사은이시여! 나에게 빛을 주소서. 두 눈을 바로 뜨고 어두운 거리로 뛰어들겠나이다. 오 사은이시여! 나에게 열을 주소서. 이 한 몸 다바쳐서 차가운 사회를 감싸주겠나이다.”

주산 송도성 종사가 원기 21년(1936) 30세 되던 해에 노래한 시가(詩歌)이다.

그는 이 세상을 살기 좋은 낙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 대종사의 일원대도의 교법을 세상에 널리 베풀어 실행하는 교법의 사회화 운동에 직접 나선 선진이었다. 그리하여 해방후 전재동포구제사업을 발의하고 진두지휘하였던 것이다.

우리 원불교가 새로운 종교로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이 사회와 세계를 구원하고자 함이다.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고해에 헤매는 일체 생령을 건져낼 제생의세의 큰 경륜 실현에 우리 모두 주산 송도성 종사의 순직(殉職)의 정신과 실천적 행동을 체받아 올곧게 나아가야 하겠다. 때마침 주산 종사 탄생 백주년을 기하여 추모사업이 열리게 되어 스승님의 빛나는 정신과 실천행을 기리게 되어 다행이다.

송인걸 교무 swk5713@w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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