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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당을 찾아서} 전농교당
{교당을 찾아서} 전농교당
  • 우세관 기자
  • 승인 2007.12.14
  • 호수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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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농교당 전경
▲ 교당교의회에서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전농교당 출재가 교역자들.
전농을 떠나지 않고 면목에 가며
면목에 있으나 전농을 지은 소식


새 집을 지으면 그렇게 좋은걸까?

9일 전농교당 소법당에서 이루어지는 교당 교의회에서는 끊임없이 웃음소리가 번져 나왔다. 단별로 커진 집 청소 당번 정하는 것도 즐겁고, 공양단을 정하는 것도 행복한가 보다. 빚이 20%가 남았지만 번듯한 법도량 마련은 거기에 비교가 되지 않는가 보다.



객지생활

교당을 지으면서 전농교당 교도들은 이웃한 면목교당과 하나가 되었다. 옆 교당과 친한게 그리 새삼스러울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도시권은 다르다. 그렇다고 교당을 하나로 합쳤다는 말도 아니다.

전농교당은 올해 24년된 작은 교당을 헐고 이웃으로 터를 넓혀 교당을 신축했다. 11월11일 신축된 교당으로 입주하기 전까지 8개월간 ‘객지생활’을 했다. 서울교구 보은장터에서 늘 보리밥 장사를 하던 그 혈심어린 협력이 큰 힘이 된듯 하다.

교도들은 교당 뒷편의 휘경여중고에서 법회를 진행했다. 휘경학원은 최준명 교도가 이사장이고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나 한국보육원과도 빼놓을 수 없는 교단적 인연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객지생활’이 덜 피곤했다.

8개월간 교무진은 면목교당에 기거했다. 그래서 전농교도들이 면목교당을 드나드는 계기가 되었고, 면목교도들은 전농 교무진을 ‘내 집 교무’로 여기며 받들었다. 면목교당 유용진 교무와 교도들의 배려는 전농교당 교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것이 ‘전농교당을 떠나지 않고 면목교당에 가며, 면목교당에 있으나 전농교당을 지은’ 까닭이다.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전농교당과 면목교당은 시골의 그것처럼 끈끈하고 훈훈한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리석 불단

전형적인 서울 주택가 한 가운데 일원 상징탑이 우뚝 솟았다. 멀리서 저층 지대를 둘러 싼 주변 아파트층에서 보면 단연 교당이 눈에 띈다. 묘하게 기운이 밀려들 것 같은 분위기다. 4층 옥상엔 제법 너른 텃밭이 조성되어 있다. 배추는 잘 안되었지만 무는 올 김장에 사용이 된단다. 법회가 끝나면 전 교도가 식사를 하는 탓에 한동안 이곳에서 나온 고소 나물이 인기를 끌었다.

또하나의 특징은 2층 대각전의 불단이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는 것이다. 생소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꽃꽂이를 해두니 거울처럼 비치는 것이 그 화려함을 더했다. 일원상 장엄이 더욱 돋보여 신앙적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다달이 총단회를

새 집으로 교화의 진용을 갖춘 전농교당은 총부와 교구의 교화계획에 맞추어 매년 15%의 성장을 이루기로 했다. 거기에 내년엔 법회출석자 가운데 무결석자 50%를 만들기로 했다. 일요일에 일이 있어 법회에 빠지더라도 당일 교당을 방문하여 기도를 올리면 법회출석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또 중창단을 만들어 장차 합창단으로 발전시켜볼 계획도 갖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단장들의 회의체인 총단회를 다달이 운영하고, 신입교도들의 훈련도 강화할 예정이다. 교당 비전수립과 더불어 봉불식을 앞둔 3월2일에는 교구장을 초청해 소속 교도가 모두 참여하는 총력법회도 진행할 예정이다.

우세관기자 woo@wonnews.co.kr



전농 교당 역사

내년 3월 30일 봉불식


전농교당은 원기55년 원남교당을 연원으로 서울의 변두리였던 답십리 교화를 위해 설립되었다. 5년만에 현 위치에 교당을 옮겨 24년간 교화를 펼쳐왔다. 특히 이웃한 서울시립대에 시원회라는 동아리를 설립해 대학생 교화에 정성을 다해 시원회는 원대연과 서대연 회장을 두루 배출했고, 출가 교무도 2명을 배출했다.

전임교무들이 이웃집을 사서 교당 확장을 꾀하며 신축을 하게된 근본적인 계기는 ‘늘어나는 청소년 교화’ 때문이었다. 당시 김제원 교무(안암교당)가 공부로 이끄는 청년회는 시원회 대학생들까지 가세하며 교화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자 법당이 좁아지고, 교도들은 돈이 없어도 교화의 물결을 수용해야겠다는데 모두가 동의한 것.

전임 진문철 교무는 30곳이 넘는 이전부지 물색을 했고, 이웃 교당과 통합하는 방안, 학사관과 함께 추진하는 방안 등을 검토했으나 결국 현 부지에 건축을 시작했다. 건축의 최대 걸림돌은 역시 주택 밀집지역의 한 가운데라 ‘민원’이었다. 건축에 따른 소음과 분진 공해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극복의 방법은 역시 불공이었다. 전농교당 교도들은 이제 내년 꽃 피는 3월30일 신축봉불식을 앞두고 ‘마음봉불’을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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