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진영교당 조대진 교도회장
직원들 생계 위해 성냥공장 유지
입교 후 50년 동안 법회에 결석한 날 없어

 

진영교당 조대진(80·호적명 창순) 교도회장은 성냥공장 사장이다. 작고한 남편이 2대회장이었고 조 회장은 4대회장으로 14년 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어 진영교당의 역사를 남편과 함께 번갈아 엮어 온 인물이다.

좀체 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조 회장의 성냥공장을 방문했을 때 깜짝 놀랐다. 가내 수공업 규모의 작은 공장인 줄로만 알고 대뜸, “하루에 몇 통쯤 생산하느냐”고 물었던 것인데, 조 회장은 정확한 대답 대신 “요새는 성냥개비를 담은 20GP짜리 콘테이너 2개가 석 달에 한 번꼴로 공장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아직도 성냥이 쓰이는 데가 있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는단다. 호롱불이 아닌 전깃불 시대에 자동으로 점화되는 가스레인지가 있고, 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집이라면 널린 것이 1회용 가스라이터인데 ‘성냥’이란 낱말이 새삼 아득한 향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 회장의 말에 따르면 성냥은 사찰 혹은 호텔이나 다방 등 접객업소에서 쓰인다. 생산된 성냥은 수요자들에게 직접 납품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광고업자의 의뢰로 주문생산을 하고 있다.

성냥개비는 성냥공장이 성황을 이루던 시절에는 자체 생산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버드나무가 성냥개비의 재료인데 요즘 버드나무가 귀한데다, 나무가 있더라도 운반해 올 인력이 없어 부득이 성냥개비를 수입해 쓰고 있다.

“성냥개비를 진작부터 수입해야 했어요. 하필 IMF가 터질 무렵 수입을 시작했는데 그 때 적자를 많이 봤어요. 비싼 기계를 놀려둘 수도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공장을 돌려왔죠.”

조 회장의 성냥공장은 부친 조병철씨에 의해 1947년에 설립됐다. 양조장이나 도정공장과 같은 시설이 주요한 산업기반이던 시절에 성냥공장은 획기적인 것으로 당시 김해시(김해군) 최초의 개발상징으로 꼽혔다. 1976년 조 회장이 아버지로부터 공장을 이어받으면서, 생산라인을 수동에서 자동으로 개선했다. 공장이 잘 되어서 박정희 정부로부터 새마을 공장으로 지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경북의성의 성광성냥과 함께 전국에 둘 뿐인 기업으로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그 시절이 좋았어요. 성냥공장의 호황기였죠. 집집마다 성냥이 없으면 안 되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종업원 수가 자그마치 200여명이었어요.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 이들이 밤낮으로 교대를 하면서 공장을 돌렸어요. 그 시절에는 성냥공장 안 다녔다면 진영사람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죠.”

텅 빈 수위실과 함께 있는 정문의 벽에 ‘경남산업공사’라는 회사명패가 붙어 있는 조회장의 성냥공장은 퇴락해 보였다.

공장 안을 들어서자 공장 안에는 미각기·왕발기·성냥제조기·축렬기·건조기 같은 커다란 기계가 꽉 들어 차 있다.

조 회장은 두 곳뿐인 성냥공장이지만 이 중 최장수 공장의 최고령 사장이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공장을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예요. 공장 직원들이 현재 15명인데 다들 나이가 많아요. 이들이 벌어먹고 살도록 해주고 싶어요.”

조 회장은 80의 노구임에도 매우 건강하다. 한 번도 병치례가 없었단다. 체중도 여태껏 42kg을 넘겨본 적이 없다. 진영교당 이성규교무가 조 회장에게 “바람 불면 날아 가겠네요”라고 말하자 “교당 가는 길의 육교에 바람이 불면 법회에 못 나옵니다”며 우스개 말로 답했다.

조 회장은 “마음공부는 못하지만 32살 나이에 입교한 후 50년동안 법회에 결석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며 “교당에 오는 것이 마음수양이 되니까 법신불께 의지하고 항상 바르게 살겠다고 기도한다”는 말을 했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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