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법천 교도·진주교당 / 논설위원

무자년 처음 나온 원불교신문을 펼치고 신년 인사차 올려진 수 많은 사업체와 기관과 무슨 모임들의 이름을 보면서 원기100년이 안된 우리 교단이 참 많은 외적 성장을 했구나 하고 감탄했다.

“집짓는 순서”라는 사설을 읽으면서 또 다른 여러 가지 감상이 들었다.

이 회상이 커다란 집이라면 과연 저 단체나 법인들이 그 주춧돌이 되고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오직 교도 한사람 한사람의 공부와 수행 만이 뿌리가 될 수 있고 그것을 뒷받침 하는 교단의 짜임새 있는 역할 만이 주춧돌이 될수 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런 후에야 비로소 저 사업체들은 일원세상을 만드는데 바르게 일조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쉽게 “우리 교법은 공부와 사업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 공부하고 공부 하면서 사업을 한다” 라고 말해 버린다.

옳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가지 절대적 조건이 있다.

걸음마도 못하는 아기에게 아무리 영양가 많은 음식을 주어도 스스로 먹지 못한다. 상당 기간 보살피고 가르치는 엄마의 손길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공부와 수행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키워줄 마스터 플랜도 부족하고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않다.

몇 종류의 팜플렛과 몇 가지의 경전 해의와 개인이 쓴 단행본들 그리고 몇마디 듣는 설법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교역자들은 맡은 외적 사업에 바빠서 아기를 돌볼 겨를이 없다.

어느 종교나 경전의 말씀과 법문들은 그 본뜻을 바로 이해 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자칫하면 주관적인 해석을 하고 그 해석을 믿어 버리기가 십상이다.

그것을 “모르고 믿으면 미신”이라는 말씀의 본뜻이다.

미신을 믿는 원불교 교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닌데도 이 상태를 방관하고 공부와 사업이 둘이 아니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교도들을 교단 사업의 일꾼이나 물주로 전락 시킬수 있다.

물론 비대한 타 종교들 속에서 살아 남기위한 최소한의 덩치 키움을 부정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만년을 이어갈 이 회상은 남 보다 약간은 느린듯 하더라도 바른 이상을 가져야 한다. 바른 이상은 느린듯 하지만 가장 빠른 길이고 튼튼한 길이다.

정혜계는 삼학이다. 공부와 수행 그리고 사업과 교화도 삼학이다. 삼학은 병진 되고 회전 되어야한다.

그러기에 올해는 교도 한사람 한사람이 도의 맛을 보는데 한층 더 노력 하는 한해가 돼야 하고 교단은 그 노력을 앙양시키고 뒷 받침 하는데 혼신을 다 해야 한다.

개벽의 길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부터 밖으로 뻗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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