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중 교무(왼쪽)와 오진경 교무
우리는 점심을 같이 하려고 만났습니다. 나는 콩이 몸에 좋으니 두부 요리를 먹자고 하자, 친구는 무슨 소리냐며 카레가 더 좋으니 카레라이스를 먹자고 합니다.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그냥 헤어지고 맙니다.

예를 들어 쉽게 한 이야기지만, 조금 떨어져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둘이서 의논하여 이번에 두부 요리를 먹었다면 다음에는 카레라이스를 먹을 수도 있고, 두 가지 음식을 다 하는 장소를 찾아갈 수도 있지 않겠냐”며 차분하게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이렇게 쉬운 답을 찾지 못했고 각자 화를 낸 채 가버립니다.

“어쩜 저럴 수 있냐?”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진 않아.”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으나 본인 앞에 이런 경우가 생기면 앞의 두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당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에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정작 자신의 일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틀이 제일 정확하다고 믿고 있으며,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큰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불안감이 자기의 것을 놓지 못하게 하고 꽉 붙잡게 하여 그 틀은 점점 단단하여 집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일은 다른 사람의 경우처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엄마는 정확한(?) 엄마의 틀에 꼭 들어맞는 자식을 원하고, 아이들은 반대로 엄마가 자기들의 틀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이 상반된 마음은 가족 간의 갈등을 깊어지게도 합니다.

교당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도마다 자기의 틀만을 주장한다면 원만함이 가득해야 할 교도간의 관계는 원망심으로 가득 찰 수 있으며, 교무님과 교도 사이에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의견을 듣지 않으려 하면 섭섭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원망심, 갈등을 줄이려면, 우선 나의 것과 너의 틀이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조금 다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름을 인정한 순간 단단했던 서로의 틀은 부드러워지고 화합의 틀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말은 쉽고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내 앞에 닥쳤을 때도 어렵지 않게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힘은 마음 공부를 잘 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 혼자 하는 공부 말고, 서로 이야기로만 하는 공부도 아니며, 내 앞의 일들을 얼마만큼 잘 대처하고 있는 가를 살피는 실질적인 마음 공부가 이루어졌을 때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여 나와 너의 틀을 부드럽게 만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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