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법천 교도·진주교당
높은 산을 쉽고 바르게 오르려 하면 등산로를 따라 차근 차근 오르는 것이 정행이다.

우리 공부인이 오르려 하는 산은 일원상 진리의 신앙과 수행을 통한 성불의 자리이고 가장 완벽한 등산로는 대종사님의 말씀 곧 정전이다.

그러기에 정전의 토씨 하나 쉼표 하나라도 임의로 풀이 하거나 첨삭 할 수 없게 하셨다.

올해는 3년마다 있는 법위 사정의 해다. 그래서 법위 사정이 과연 정전의 본뜻과 얼마나 부합하는 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법위 승급은 “법위사정 규정”에 준하고 있다. 이 “규정”이란 말이 어떤 틀을 만들어 그 틀 안에 맞으면 승급을 시키겠다는 뜻인데도 본시 어떤 틀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위사정 규정 자체가 가당치 않은 것이 된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도란, 정전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 스스로 미루어 짐작 하거나 이심전심 하는 스승님의 판단에 의지 할뿐 규정이란 이름의 줄자로 가늠하여 평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을 자로 재고 구름을 무게 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수행편 17장 법위 등급은 스스로 마음 속에 지녀야 할 표준을 말씀하신 것이지 타인의 손에 쥐어 준 저울로 쓰면 안된다.

출가 교역자가 교도의 공부 정도를 어떤 식으로라도 평가 한다는 것은 지극히 난측한 일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그 업에 따라 다중의 인격을 표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의 모습과 사회에서의 모습과 교당에서의 모습 등은 각각 다르게 나타 날 수 있기 때문에 생활 전체를 관찰 하지 않고 하는 평가가 옳게 되기는 어렵다.

일례로 우리 주위에는 많은 선량한 이웃에게 갖가지 형태의 사회적 해악을 끼치고도 진정한 참회나 배상없이 교단이 정한 규정에만 충실 하여 법호인이 되는 경우가 상당 수 있다. 이것은 자칫 교단이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또 훈련은 시키는 자와 받는 자 모두 얼마나 내실 있게 행하고 있는 지를 엄히 점검 해야하고 참석 불참석 만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은 훈련을 요식 행위로 전락 시킬 수 있다.

희사금을 점수화 하는 부분도 다시 고려 해야 한다. 파출부 여인의 십만원과 재벌의 십만원이 같은 가치로 인정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도는 숫자가 주인이 아니고 흘린 땀과 정성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도를 규정으로 잰다는 것은 코메디고 그 코메디의 크라이막스는 나이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성현님들을 차치하고라도 대종사님께서 스물 여섯 춘추에 이루신 대각은 이 규정으로 어찌 설명 할지 듣고 싶다.

대종사님 생전에는 교도의 수가 일천하여 한교도 한교도의 공부와 수행의 정도를 평가 하시는 것이 가능 하셨을 것이고 참 여래의 심안으로 보시는 평가에는 규정이란 아예 없어도 완벽 하셨으리라 능히 짐작된다.

아직은 중생일 수 밖에 없지만 도는 규정으로 묶거나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닌 것은 삭제하는 용기가 없이는 영원히 바른 개벽의 길로 나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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