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다. 내용은 이렇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가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던 중 아들이 납치되어 시체로 발견되고 여자는 고통으로 방황한다. 그때 우연히 찾은 교회는 어둠속의 비상구였다. 여자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여 절망의 덩어리를 토해내고 싶었을 것이다.

드디어 여자에게 평화가 찾아온다. 겉으로는 신앙심도 깊어진다. 여자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자, 어미인 내가 당신의 죄를 사해주고자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그런데 여자가 면회소에서 만난 사람은 이미 살인자가 아닌 기독교 신자였다. 그 살인자는 여자에게 "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하셨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여자는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어떻게 살인자가 나보다 더 홀가분하고 편안하게 살수 있단 말인가? 내가 용서를 안 했는데, 도대체 누가 용서를 해주었단 말인가? 나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하나님에 분노한 여자는 다시 방황한다. 여자는 자기의 종교에 대한 입장을 김추자의 노래로 대신한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이런 류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입장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굳이 기독교의 눈높이로 그 여자의 태도를 비난하지 않는다. 여자는 단순하게 인간끼리의 용서를 먼저 하고 싶었을 뿐이고, 나는 그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기분은 무거웠다. 전철을 탔다. 만원이었다. 문 옆에 서서 용서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중년의 남자가 '예수 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필사적이었다. 신경을 거슬리는 소음과도 같았다.

<밀양>에서도 그랬다. 그 사내가 영화 속의 약사와 겹쳐졌다. 여자를 전도하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리는 약사의 모습이 바로 그 사내의 모습이었다. 최근에 물의를 일으킨 어느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내가 경동교를 만들면 안 되듯이 석가모니도 불교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코믹한 설교로 인기를 얻더니 교만이 하늘나라에까지 도달했다. 그렇다고 설마 종교전쟁까지 갈까. 그러나 정부까지 나서서 편을 든다면 이것도 현실로 다가 올 수도 있다.

맬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강의시간에 그 영화에 대해 토론을 했다. 나처럼 나만큼 학생들도 인간적인 예수의 수난에 감동을 받았고, 그 중 몇 명은 교회에 나간다고 했다. 종교가 비난받는 현실에서 이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순수로 회귀하면 인간의 구원은 항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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